영국의 스쿨 21과 미국의 NTN의 교육 실험
우리가 살아갈 미래는 더 이상 예측 가능하지 않다. 기후 변화, 기술 혁신, 세계 질서의 재편, 그리고 AI의 급속한 확산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삶의 형태를 계속해서 흔들고 있다. OECD가 「Education 2030」에서 학생 주체성(Student Agency)을 핵심 역량으로 제시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앞으로의 시대는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보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예측불가능한 상황에서 나와 인류를위한 좋은 삶(wellbeing)을 스스로 개척해갈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의 학교는 여전히 정답 중심이다. 속도는 교과서에 의해 결정되고, 학습의 과정은 결과에 밀린다. 학생이 스스로 배움을 조절하고 선택하는 경험은 제한적이다. 학생 주체성은 수업을 바꾼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고 실행하 수 있는 기회와 여백을 통해 생긴다. 그렇다면, 학생의 주도성이 살아있는 학교의 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영국과 미국의 학교 사례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실험해 볼 수 있는 미래 교육의 모습을 상상해 보고자 한다.
School 21은 2012년 런던 스트랫퍼드 지역에 설립된 전일제 학교다. 이 학교는 교육의 중심에 말하기(Oracy)를 둔다. 여기서 말하기는 단순한 발표 기술이 아니라, 사고를 조직하고 타인과 관계 맺는 능력이다. 학교는 말하기를 읽기·쓰기·수학과 동등한 지적 기초 역량으로 다룬다.
School 21의 교실은 조용하지 않다. 학생들은 원탁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근거를 묻고, 질문을 건넨다. 'Traverse Talk'에서는 다른 관점을 지닌 사람과 생각을 교차하며 자신의 논리를 재구성한다. 'Talk Detectives'는 교사의 역할을 대신해 동료의 발언을 평가하고 피드백을 제시한다. 학생은 타인의 말속에서 논리의 결을 읽어내고, 자신의 사고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흔들리는지를 스스로 인식한다.
이 학교의 학습 결과는 시험 점수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Big Outcome'이라는 프로젝트 결과물 포트폴리오가 학생의 학습 성장을 증명한다. 중요한 것은 이 포트폴리오가 실제 대학 진학에서 인정된다는 점이다. 즉, School 21은 '말하기 중심 수업'을 한 것이 아니라, 사고·대화·평가·진로까지 연결되는 배움의 구조를 재설계한 것이다. 이 실험이 가능했던 이유는 영국 아카데미 제도가 학교에 교육과정 자율권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혁신은 좋은 철학에서 출발하지만, 지속되는 혁신은 제도가 뒷받침할 때 가능하다.
New Tech Network(NTN)는 미국 전역 200여 개 학교가 속한 학교 네트워크 혁신 모델이다. NTN은 학습을 100% 프로젝트 기반 학습(PBL)으로 운영한다. 그러나 여기서 프로젝트는 단순한 수업 방식이 아니다. 학교 운영 전체의 원리다.
학생들은 팀 단위로 실제 문제를 해결하며, 그 과정에서 네 가지 핵심 역량을 중심으로 배운다. 협업, 의사소통(구술·서면), 비판적 사고, 책임감. 이 네 가지는 학교마다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에 소속한 학교는 어디든 공유하는 표준화된 역량이다. 학습 과정은 모두 Echo 플랫폼에 기록된다. 학생은 자신의 진행 상황과 피드백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조정한다. 학습은 교사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책임지는 구조가 된다.
교사는 강의자가 아니라 프로젝트 설계자이자 학습 촉진자로 움직인다. 교사의 전문성은 개인 경험이 아니라, 학교 전체가 공유하는 설계 능력으로 축적된다. NTN은 "학생 주체성은 개인의 태도가 아니라 시스템 설계의 문제"라고 말한다. School 21이 생각을 언어로 다듬는 힘을 기른다면, NTN은 현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힘을 일상적 배움의 구조로 만들어낸다.
한국에서도 학생 주체성을 향한 교육 실험은 낯선 것이 아니다. 대안학교, 공동체 학교, 기숙형 자립학교, 혁신학교 등은 지난 30년 동안 학생의 속도와 삶의 맥락에 맞춘 배움을 꾸준히 실험해 왔다. 경기도교육청의 '신나는 학교'는 공교육 체제 안에서도 학생 주도 배움을 구현하려는 사례 중 하나다. 학생이 스스로 학습 주제를 선택하고, 탐구의 깊이와 속도를 조절하며, 기숙 공동체 생활 속에서 관계적 배움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학교가 설계되었다.
즉, 한국 역시 학교 제도를 넘어 학생 주체성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해보았다. 다만, 그 실험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지 못한 채 제도 밖의 경험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문제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학교 모델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실험을 공교육의 제도적 기반으로 전환하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입시에 모든 것이 올인된 학교 제도 속으로 제도 밖에서 다양한 교육 실험을 해왔던 경험을 사장시켜서는 안된다. 자기 주도성이 살아있는 대안학교의 교육과정, 교사와 학생에게 부여된 실질적 자율권을 제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오히려 필요하다. 자율이 방만함으로 흐르지 않도록 역량 기반의 투명한 평가 체계를 마련하며, 학생의 학습 성장이 대학 입시 및 사회 진출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경로를 보장해야 한다.
학생 주체성은 수업 기술로는 자라지 않는다. 구조가 허용할 때에만 실현된다. 아이들은 스스로 배울 수 있다. 학교가 해야 할 일은 그 길을 막지 않는 것이다.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아이들이 자신이 서고 싶은 자리로 나아갈 힘은 길러줄 수 있다. 교육은 그 힘을 가능하게 하는 토양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