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 쉑오 해변
모든 가치 있는 것은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나 보다. 도심에서 쉑오 (Shek O) 해변에 당도하는 길은 짧지만 순탄하지만은 않다. 북악 스카이웨이 부럽지 않게 구불구불한 길을 차로 가야 해서, 택시 기사님의 운전 스타일에 따라 집에서 20-30분가량 소요되었다. 다만 그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기분이긴 했다.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고, 잠시나마 빌딩 숲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사실 홍콩은 섬이니 집에서 걸어서 가까운 거리에서도 바다를 볼 수는 있지만 거긴 모래사장이 없었다. 콘크리트 바닥이나 벤치에 앉아도 되지만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깔고 앉고 싶은 날도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바다 건너 카울룬 (구룡반도)가 보이는 것이 해안가나 섬에서 자라지 않은 나의 눈엔 영 어색했다. 바다란 자고로 끝이 없이 나를 향해 쏠려오는 물결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곳이니까. 그러니 건너편에 거대한 빌딩과 다리가 보이는 육지가 있으면, 내 눈앞에 담긴 것이 바다라고 인식하기 어려웠다. 또, 고운 모래사장이라고 자랑할 수는 없어도, 쉑오에는 모래사장이 있었다. 물론 리펄스 베이 같은 해변이 더 유명하고, 거리도 비슷하긴 했다. 리펄스 베이는 홍콩의 최고 부유층이나 아니면 회사에서 집을 대주는 외국계 회사 간부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다. 서울과 비교하자면 한남동, 서래마을과 같은 고급 주택가 근처의 분위기라고 하면 될까? 그래서 해변가에도 깔끔한 식당과 카페가 즐비했다. 보통 친구들과 조금은 특별한 나들이 약속을 잡으면 리펄스 베이, 남편과 단둘이 피크닉을 갈 땐 쉑오에 갔다.
우리의 홍콩살이 마지막 몇 달은 정말 갑갑한 시기였다. 홍콩 정부가 언젠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화해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지면에 자세히 풀 마음에 준비가 되지 않은 개인사도 있었다. 팬더믹 2년 차인데도, 3인 이상 혹은 5인 이상 공공집회가 금지되는 나날이 이어졌다. 사실 리펄스 베이가 따뜻한 기억으로만 자리 잡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공공 집회 금지 때문이기도 했다. 야외 모임은 용인해주는 시기가 있어서, 그때마다 홍콩을 떠나는 친구들과의 작별 모임을 리펄스 베이에서 하게 되었다. 그 까닭으로 리펄스 베이가 내게는 이별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 같다.
운동을 하러 갈 수도 없고, 친구들과 모여서 술을 한 잔 할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일, 먹기, 자기, 넷플릭스 보기, (운동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으니) 비디오 게임기로 운동하자고 나 자신을 구슬려보기가 전부였다. 그래서 과연 우리가 계속 이렇게 홍콩에 머물러 있는 것이 맞을까 고민했다. 그렇게 친구한테도 할 수 없는 신세한탄하고 싶은 날, 쉑오가 우리를 불렀다. 커다란 캔버스 백에 돗자리, 치즈, 햄, 크래커, 와인 한 병, 유리잔과 냅킨 몇 장을 챙겨서 택시를 탔다. 그 어느 곱슬머리보다도 더 곱실거리는 길을 차를 타고 가면 미슥거렸지만, 곧 발가락 사이로 느끼게 될 모래를 떠올리며 숨을 골랐다.
처음 쉑오 해변에 간 것은 슈퍼 문이자 블러드 문이 뜨는 날이었다. 미리 계획한 것은 아니었는데, 홍콩 미디어에서 블러드 문이 뜬다고 호들갑을 떠니 우주에 큰 관심이 없는 나도 좀 궁금해져 버렸다. 그리고 달님, 제 청 좀 들어주세요,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이었다. 청을 안 들어주신다 하시면 달님의 옷깃을 붙잡고 따지기라도 하고 싶었다. 과학과 이성을 철두철미하게 신봉하는 남편에게는 이 이야기는 쏙 빼놓고, 우주를 좋아하는 너이니, 슈퍼 문같은 우주적 대사건을 놓쳐서야 되겠느냐고 구슬렸다. 이런 달을 다시 보려면 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우리 생애에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우리 같은 자그마한 우주먼지 뭉치가 더 커다란 우주먼지 뭉치를 제대로 보는 날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일주일에 한 번 쓸 수 있는 과학 렉쳐 한도를 오늘만큼은 제해주겠다고. 특별히 오늘 은 너의 우주에 대한 지식을 마구 풀어놓아도 좋다고. 설득에 성공한 우리는 월출을 보겠다며 바삐 쉑오로 향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돌아올 때 차편이 마땅치 않으면 어떡하지 하며 걱정이 들긴 해도 일단 가보기로 결심했다.
그날 쉑오 해변을 찾은 사람들 중 기복적인 의도를 지닌 건 나 혼자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떤 여자분은 월출을 기다리며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모래사장에 커다란 원과 별을 그리시고는, 그 안에서 타로 카드로 점을 보시더니 깃털을 모래 위에 뿌리고 계셨다. 정확히 무얼 하고 계신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나와 비슷한 심정을 몸소 행동으로 옮기고 계셨던 것 아닌가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콘크리트 사면에 갇혀서 산 것은 나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홍콩에 사는 우리 모두 다 그랬으니까. 그분께서 행하신 의식이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것이었길 바랐다. 사실 팬더믹을 살아내며, 우리는 소원을 빌 때 더 이상 우리 자신만을 위해 빌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고 믿는다. 나의 바람과 상관없이 그분이 세상을 향한, 모두를 위한 소원을 비셨을 것이라 믿는다. 분명 그날 해변의 우리 모두는 같은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애타게 기다리던 달이 떴다. 슈퍼 문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찬란했다.
달은 정말 컸다. 아니면 슈퍼 문이라고 하니 그리 보였던 것일까? 이미 와인을 한 잔 마신 상태라서 더 그래 보였는지도. 명색이 블러드 문이라던데 막상 핏빛이 도는지는 잘 모르겠더라. 레드 와인과 상호 대조해보아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블러드 문은 전혀 불길해 보이지 않았다. 달이 뜨기 전 인스타그램 피드에는 블러드 문이 불길한 징조라고 이야기하는 수상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발칙한 예측이 무색하게 달님은 그 고운 모습을 보여주실 뿐이었다. 빼곡한 빌딩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달이 아니라 달무리까지 아무런 장벽 없이 볼 수 있는 게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고아한 자태에 모두가 탄성을 내뱉었다가 고요해졌다. 카메라를 준비했던 이들도 셔터 누르는 것을 잊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 잠시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한반도의 자손답게 달님께 소원을 빌었다. 청을 안 들어주시겠다는 답변은 하지 않으셨다. 내 청을 들어주려 노력해보시겠다는 걸로 받아들였다.
아까 새하얀 옷을 입고 일종의 의식을 치르시던 여자분은 홀로 아무런 음악도 없이 달 아래서 춤을 췄다. 나는 춤사위에 함께하지는 못하고,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고이고 학창 시절에 배웠던 백제의 고대 가요 정읍사의 도입부를 속으로 되뇌었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 어긔야 어강됴리 / 아으 다롱디리.' 달님 높이 높이 뜨셔서 멀리멀리 환히 비춰주시어요. 우리는 달님의 그 빛이 필요합니다. 암흑 속 촛불처럼 저희 갈 길을 밝혀주시어요. 문학 시간에 분명 후렴구의 뜻이나 기능을 배웠을 텐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나의 편의 대로, 후렴구는 마법 주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세상아, 다 괜찮아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상점가가 즐번하지 않은 쉑오이기에, 많이 어두웠다. 그래서 달님이 파도 위에 진주빛으로 수놓은 윤슬이 더 잘 보였다. 그 외에는 보이는 것이 많지 않았다. 바다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님의 목소리는 청명하게 들렸다.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바다님은 이 시간도 다 지나갈 것이라고, 다 잘 거쳐낼 것이라고 나지막이 말씀해주셨다. 바다의 청음을 메트로놈 삼아 내 심장도 그 박자를 맞추었다.
그리고 보니, 한낮의 쉑오를 본 적이 없다. 꼭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나서 어스름한 해 질 녘에 갔으니, 쉑오 해변의 물이 맑은지 안 맑은지도 모르겠고 태양 아래의 쉑오가 무슨 빛깔 인지도 잘 모른다. 모래사장도 백사장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날 뿐, 어떤 색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운이 좋으면 노을을 볼 수 있었고, 일정이 끝나자마자 부지런히 가지 않은 날엔 밤바다가 우리를 맞이했다. 바다가 두런두런 해주는 말, 바다의 간간한 숨결, 밝은 달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별들, 신발 안으로 들어와 우리 집까지 꼭 따라오는 모래까지. 제대로 보지 못하는 대신 더 많이 듣고 어루만지게 되었다.
처음 쉑오에 가서 슈퍼 문을 보며 빌었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다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한 서너 개는 청했을 테다. 그중 가장 간절했던 소원은 이뤄졌다. 이뤄진 소원이 무엇인지는 달님과 나 사이만의 비밀이다. 지금 침실에서 쌔근쌔근 잠을 청하고 있는 남편도 모르는 비밀. 나머지 소원도, 우리 모두의 소원도 다 이뤄지길 바라며 또 외쳐본다.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