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에게 절대 내가 한국인임을 알리지 말라!

프랑스 퓌토의 에어비엔비

by 다정

드디어 자유, 평등, 박애를 표방하는 나라에 도착했다. 프랑스에 오기 전 우리가 살던 홍콩은 무얼 표방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홍콩 정부의 슬로건이 무엇일지는 여러분의 검색과 상상에 맡기겠다. 자유, 평등, 박애가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화려했지만 동시에 메마른 홍콩에서의 생활을 일단락했다고 해서 프랑스에서의 삶에 아무런 난관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난관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나는 프랑스어를 할 줄 몰랐다. 봉주르, 위, 농처럼 안녕하세요, 네, 아니오가 아니면 할 줄 모르는 상태였다. 어떻게든 프랑스인들에게 웃는 얼굴로 영어와 불어를 섞어서 써서라도 요리저리 비벼보려고 노력한다고 치자. 제일 즉각적인 문제는 과연 어디서 살 것인가였다. 회사에서 거주지를 잠시라도 해결해주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우리가 직접 집을 알아보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직접 집을 방문해보지 않고 온라인상으로만 확인하고 계약하는 것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더불어 제도적으로도 우리가 프랑스에 도착하기 전, 아니면 도착한 직후에 집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자세한 사정은 나나 그대나 머리만 아플 테니 생략한다. 그래서 일단 에어비엔비를 통해 찾은 숙소에 투숙하며 집을 알아보기로 결정했다. 파리 내의 집들은 크기가 작은 경우가 많아서 살짝 공간의 여유가 있는 집을 찾다 보니 퓌토 (Puteaux)라는 파리 근교 지역에 숙소를 잡게 되었다. 공항에서 숙소로 바로 직행할 우리에게 다행히도, 공항에서 거리가 삼십 분 남짓으로 접근성이 좋았다.


홍콩에서의 우리 살림살이의 대부분은 국제 이사 회사에서 컨테이너 박스에 싣고, 배로 유럽으로 보내준다고 했으므로, 소라게처럼 우리 삶의 전부를 등에 끙끙이며 이고 지고 올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우리가 주소지가 확정이 되어야 짐을 받을 수 있으므로, 20킬로 들이 캐리어에 가득 옷과 꼭 필요한 물품을 쌌다. 그렇게 둘이서 40킬로치의 짐을 이고 도착한 숙소. 사진에서 보던 것처럼 말끔했다. 프랑스 집들은 변기와 욕실이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집도 그랬다. 나에게 낯선 구조였지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현관에서 화장실과 욕실을 지나 거실에 일단 캐리어를 뒀다. 러시아계 이름을 가진 집주인이 여기서 실거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주인은 푸른색을 좋아하는 듯했다. 벽의 몰딩도 회푸른색, 부엌의 장도 회푸른색, 소파도 푸른색이었다. 큰 그림이 눈에 들어오고 나자 작은 것들이 보였다. 거실과 부엌 곳곳에 화분이 있었고 다 생생한 것을 보니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식물들 같았다. 집주인에게 식물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냐고 문자 메시지부터 남겼다. 그리고 또 주위를 둘러보니 각양각색의 소품들이 여기저기에 보였다. 멕시코의 망자의 날에 등장할 법한 자그맣고 알록달록한 해골이 소파 앞 커피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부엌 진입부에는 활짝 웃고 있는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 걸려있고, 미국 어디선가 사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드림캐쳐도 보였다. 냉장고 옆에는 I Have a Dream 연설을 하고 있는 마틴 루터 킹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미학적 일관성이 없는 집이라고 생각했다. 아파트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침실로 갔다. 침대의 헤드보드도 거실의 소파와 동일한 푸른색이었다. 침대 위에는 뉴욕의 야경을 그린 유화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침대 발치에 자그마한 화장대 용도의 테이블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에는 꽤 큰 거울이 있었다. 거울을 통해 거실이 비췄다.


그런데 잠깐, 거울에 보이는 거 저거 뭐야? 어디서 봤던 건데? 빨갛고 파랗고... 별이 하나 있고... 에이 설마, 아니겠지. 다른 나라 국기랑 착각하고 있는 거겠지. 쿠바 국기가 저렇게 생겼었나? 검색해보니 쿠바 국기는 진짜 빨갛고, 파랗고, 별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파란색과 하얀색의 스트라이프가 국기의 대부분을 이뤘고 빨간 세모 안에 흰 별이 있었다. 거실에 걸린 것은 파란색 줄 사이에 커다란 빨간 직사각형이 있었고, 그 안에는 흰 원과 빨간 별이 있었다. 쿠바의 국기가 아니었다. 나는 너무 놀라 짐을 하나둘씩 풀고 있는 남편을 뒤로하고 거실에 있는 빨갛고 파랗고 별 하나 있는 것에 다가갔다. 내가 보고 있던 것은 유화였다. 사람들이 매스 게임으로 국기와 '아리랑 민족'이라는 글씨를 형상화하고 있었다. 어? 아리랑 민족? 나 지금 한글을 읽은 것 맞나? 그럼 저 국기는? 한국어가 쓰여 있는데, 대한민국 국기가 아니고, 빨갛고 파랗고 별이 하나 있고, 옆에는 한글이 쓰여있고?


한국어를 쓰는 국가가 두 군데밖에 없는데, 어디겠는가. 그 국기는 당연히 북한의 국기였다. 스마트폰으로 잽싸게 검색해보니 맞았다. 우리가 앞으로 두세 달 가량 머물려는 숙소의 거실에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인민들이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국기와 아리랑 민족이라는 글씨를 매스 게임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유화가 걸려있었다. 여느 유화처럼 캔버스 한 구석에는 화가의 이름이 서명되어 있었다. 박땡땡 (만에 하나라도 탈북 화가일지도 모르니 그의 신변 보호를 위해 서명되었던 이름을 공개하지는 않겠다). 한국어로 검색해보아도, 영어로 철자를 바꿔가며 검색해보아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서구권에서 활동하는 탈북 화가가 아닐 것 같았다. 그러면 이 그림은? 이 그림은 북한에서 '직구'한 그림이란 말인가? 다시 찬찬히 아파트를 살펴보니, 이 집은 매우 일관성이 있는 집이었다. 집주인이 각종 여행지에서 사 온 일종의 전리품들이 곳곳에 자리한.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집주인의 이름은 분명 러시아어로 된 이름이고, 러시아의 전신은 구소련이고, 구소련은 공산주의 국가였고, 북한도 공산주의 국가이고. 그런데 집주인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더라? 아니다, 그 사람이 무언가 의심스러운 일을 하는 사람이더라도 자기가 의심스러운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떳떳하게 밝힐 리가 없지. 제임스 본드나 사기꾼이 아니고서야 누가 '나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첩보원이오'라고 하고 다니겠냐는 말이다.


나는 재빨리 남편에게 이 상황에 대해 알렸다. 나는 대한민국 시민이고 저 그림은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국기가 있고! 나는 지금 내가 이 집에 있는 것만으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서 너무 무섭고! 나는 혹시 집주인이 내가 대한민국 시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부터 물었다. 우리가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 뿐 나의 이름이나 국적은 모른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럼 우리 집주인에게는 나의 이름과 국적을 절대 알리지 말자. 저 사람 알고 보니까 북한과 연이 있는 사람이면 어떡해. 만약에 굳이 내 국적이랑 이름을 물어보면 미국 사람이라고 해! 이름은! 아무거나! 제인 뭐시기 뭐 아무거나! 지금 우리가 정해야 너도 편하면 그럼 내 이름은 제인 스미스라고 하자!" 나는 남편에게 급박하게 지령을 내렸다.


남편은 이 집을 보니 파란색이 많던데, 무지하고 세계에 눈이 뜨이지 않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나 집주인이 집안의 테마 색을 파란색으로 맞추려고 저 그림을 건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왠지 화가의 이름이 구글로 검색했을 때 검색 결과가 하나라도 나와야 할 것 같았다. 검색 결과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박땡땡이 무명의 화가이거나, 북한에서만 활동하는 화가라는 뜻 아닌가? 게다가 탈북민 화가가 북한 체제를 선동하는 듯한 그림을 그릴 까닭은 무엇이란 말이가? 그리고 집에 있는 다른 여행지 기념품을 보아도, 이게 여행이나 출장(!)의 기념품이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어찌 되었든, 최대한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것이 나았다.


에어비엔비에는 집주인이 투숙객을 친절히 맞이 했다거나, 같이 커피나 식사를 한 적이 있다는 리뷰도 있었다. 다행히도 우리가 프랑스에 도착한 시기에 집주인은 한국에 없었다. "앞으로도 만약 집주인이 사적으로 만나서 놀자고 하면, 우리 프랑스 너무 잘 적응해서 도움 줘야 할 것 하나도 없고 그리고 일 때문에 너무너무 바빠서 차마 시간이 안 난다고 미안하다고 해!" 그렇게 추가 지령도 내렸다. 집주인이 따로 만나서 놀자는 제의를 할까 봐 두려워했던 것은 성급한 우려였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투숙 기간 내내 집주인은 우리와 오프라인으로 만날 의사가 없었다.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다.


다음 날 숙소가 좀 정리되고 나서 엄마에게 잘 도착했다는 영상 전화를 걸었다. 나는 또 별생각 없이 거실에서 전화를 걸었다가 내 뒤로 문제의 그림이 카메라에 담겼는데, 나는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 엄마께서는 전화를 받으시더니 화들짝 놀라셨다.

"아니 저게 뭐야?"

"북한 국기 그림이요..."

"그래도 네가 한국인인데 저런 게 걸려있는 건 좀 아니지 않니? 집주인한테 양해를 구하고 치워."

엄마의 미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엄마 미쳤어??? 집주인한테 어떻게 양해를 구해. 저거 보니까 북한 가서 사 온 것 같은데. 만약에 북한에서 비즈니스라도 하는 사람이면 어떡해! 날 북한 정부에 넘긴다던가 그러면 어떡해!"였다.

엄마는 다시 내게 "그럼 그냥 네가 저 그림 벽에서 떼서 잘 보관해놔"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의 답변은 "저거 사진도 아니고 유화야, 그러다가 내가 작품 망쳤다고 손해 배상하라고 하면 어떡해..."였다. 엄마께서는 내 답변이 탐탁지 않으셨는지 "그래도 저건 좀... 국가보안법 위반 아니니?"라고 우려를 표하셨다. 하지만 맹세컨데, 그 그림은 내 소유가 아니고, 나는 이 숙소에 그 그림이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요 판사님, 저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태극기 앞에 맹세합니다. 저는 민주주의를 사랑합니다. 비민주적 홍콩을 탈출하려다 프랑스로 흘러들어와 버렸습니다! 믿어주세요! 그래서요 판사님, 저는 그 집 사진을 여기에 전시하지도 않겠습니다! 제 고국을 위한 충정과 진의를 보아주세요!


결국 나는 숙소에서 언제나 나의 동공도 카메라도 그 그림을 피하게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연히라도 그림을 보게 되면 질문이 질문의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집주인은 대체 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로부터 이 그림을 구매했단 말인가? 아무리 검색해보아도 프랑스에서 북한 미술을 취급한다는 갤러리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 샀을 가능성은 낮다. 캄보디아에는 북한 정부가 외화벌이를 위해 직영으로 운영하는 갤러리가 있다던데, 혹시 거기서 샀나? 아니 근데 이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에 살면서 왜 그 가치에 반하는 국가의 국기가 그려진 그림을 사느냔 말이다. 아무리 그림에 파란색이 들어갔다고 해도 말이지. 내가 백날 탐정 놀이를 해봤자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그림은 우리가 마음 놓고 이 집에 가만히 머무를 것이 아니라 공격적으로, 전투적으로 새 집을 알아봐야겠다는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나는 월세 집을 찾을 때까지 파리와 파리 근교를 오가며 정말 백 군데는 되는 집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일 년 계약할 수 있는 집을 찾는 데 성공했다.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할 때 우리는 숙소를 정말 열심히 쓸고 닦았다. "이 사람 북한이랑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한테 그 어느 꼬투리도 잡지 못하게 해야 돼. 체크아웃하고 그 어떤 연락도 다시 오지 않게!" 남편과나는 장장 나흘간 그 집을 때 빼고 광 냈다. 우리가 체크인했을 때보다 더 깨끗하게. 체크아웃을 마치고 우리가 집을 비웠을 때 집주인이 집을 확인했다. 그는 문자로 '너희 청소 정말 깔끔하게 잘했더라. 모든 세입자가 이러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이야'라며 우리의 노력을 인정해주었다.


이제 다시 연락할 일도 없겠다,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남편을 시켜서 문자로 집주인에게 그림에 대해서 물어보라고 했다. 내 이름이랑 신원은 계속 미상인 상태로 두고! 집주인은 흔쾌히, 캐주얼하게 답해주었다. 자기가 몇 년 전에 북한으로 여행 갔다가 사온 그림이라고. 역시 그런 그림은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에서도 쉽게 살 수 있는 그림이 아니었다. 본고장으로 가지 않고서야 어찌 구하겠는가.


새로 이사온 집은 동네도, 구조도, 디자인도 매우 다르다. 당연히 우리의 현재의 보금자리에는 북한 국기 그림은 없다. 그림이 한 장도 없는 집이어서 안심하고 계약했다. 내가 집에 둔 유일한 미술품이라고는 동생과 동생의 남편이 선물해준 국립박물관 뮤지엄샵의 반가사유상 미니어처다. 이전 집의 미술품과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아직도 집주인이 왜! 왜 하필이면 바로 그 그림을 구매했는지는 풀리지 않는 난제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의심스러우니까, 내 신변이 어찌 될지 모르니까, 계속 미해결인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 다만 나보다 탐정력이 뛰어난 그대들의 이론이 궁금하다. 프랑스에 사는 러시아계 집주인은 왜 집에 북한 국기 그림을 걸어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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