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처럼 날개를 펼칠 그날까지

홍콩의 솔개

by 다정

하늘길이 닫혔다고 표현해도 될까? 사실 홍콩에서 나가는 비행기 편이 아예 없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출국했다가 다시 홍콩으로 돌아오려면 2-3주가량을 정부에서 지정해준 호텔 중 하나를 골라서 자비로 묵으며 격리를 해야 했다. 아,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하늘길을 향하는 문이 더 좁아졌다고 표현하는 편이 낫겠다. 한국에서의 격리도 있었지만, 홍콩 귀환 후의 격리와 비교했을 때 금전적인 부담이 훨씬 덜했다. 한국에서는 친인척의 집에서 격리를 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홍콩의 호텔 격리는 일박에 최소 15만 원 정도가 소요되어, 한 번에 수백만 원이 공중분해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팬더믹 동안 무시무시한 경제적, 시간적, 정신적 비용을 지불하고 한국 방문을 두 번, 그러니까 홍콩에서의 호텔 격리를 두 번 감행하였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역병으로 인해 해외로 휴가나 여행을 가지 못하는 답답함을 명품 소비로 해결할 때, 나는 비슷한 비용으로 한국행을 택했다. 한국에 두 번 방문하지 않았다면 고대 그리스 전령의 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가방 하나를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언제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행을 택할 것이다. 타지살이를 하는 나에게 고국에서 가족, 친구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그 어느 것보다도 소중하다. 이렇게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라 할 수 있다. 아, 물론 만약 내가 역병 창궐기의 정점에 한국에 거주 중이었고, 가처분소득이 넘쳐나서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나도 친구들과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우리 모두에게는 종종 현실 도피할 방도가 필요하니까 말이다. 이를 부인할 정도로 위선을 부리지는 않겠다.


한국 입국 스케줄을 결정하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홍콩의 격리 호텔을 미리 예약하는 것이었다. 격리 호텔이 몇 군데 없으므로, 예약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호텔에서 거주 중이었으니, 같은 방은 아니더라도 같은 호텔에서 격리를 하면 안 되냐고 문의했는데, 정부에서 지정한 격리 호텔이 아니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게 남편은 사잉푼의 호텔에서 머물고, 나는 다른 호텔에서 격리 살이를 하려니 한국에서 작품 활동하는 것이 금전적으로는 아무런 보상이 되지 못했다. 왕복 비행기 삯과 홍콩 호텔 격리 비용을 내고 나면 입금된 원고료나 리허설 통역 비용이 신기루가 되어 사라졌다.


호텔 격리 기간 동안 나는 이족 보행 동물이기를 포기했다. 오스테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에 이은 인류의 이족 보행 진화 역사를 와르르 무너뜨리는 2주였다. 나의 만보계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사과 손목시계가 일일 스텝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며 경고 알람을 띄웠다. 격리 기간 동안 나의 하루 평균 스텝 수는 거짓말 안 하고 70보 정도였다. 호텔 방 안의 동선이라고 해봐야 침대, 화장실, 탁상 이 세 가지 변수를 벗어날 수가 없지 않은가. 거기다 짐가방까지 있으니 내가 걸음을 걸을 수 있는 면적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확실히 이족 보행 동물보다는 민달팽이 정도로 칭해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민달팽이는 스텝 수를 셀 수 없을 테니 나의 방 내의 움직임과 아무런 상관없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아니 여보세요, 어딜 가시려고요?) 있는 장점도 있었다. 여기다 매일 식사를 군만두로 주문하여 배달받아먹으면 올드 보이까지는 아니어도 분명 올드 민달팽이 정도는 될 수 있으렷다.


격리 문.jpg 온갖 경고문이 붙어있는 격리 방 문. 요는 나오지 말라는 거다.

호텔방 문을 열 수 있는 경우는 딱 두 가지였다. 첫째는 정부에서 실시하는 코로나 PCR 검사. 과장을 조금 보태서 14일간 열 번은 코와 목 쑤심을 당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식사 배달. 하지만 그 어느 경우에도 내 문 앞에 그어진 빨간 선을 넘어서서는 안 됐다. PCR 검사를 할 때는 미리 의자와 쓰레기통을 빨간 금 안에 배치한 상태로 누군가가 내 방문을 노크할 때까지 대기해야 했고, 식사가 문 앞에 배달되면 호텔 직원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만 뻗쳐서 음식을 방 안으로 가져와야 했다. 쓰레기는 격리 기간 동안 배출하기가 힘드니, 남는 음식물이 없게 싹싹 다 먹은 뒤, 일회용 식기를 설거지해서 차곡차곡 쌓아서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정말 2-3주간 그 어느 다른 생명체의 목소리와 온기를 느끼지 못하는 채로 지내야 했다.


자유의 몸이라고 내가 매일 스텝 수 만보를 채울리는 없지만, 제자리걸음을 하지 않으면서 만보를 채울 수 있는 기회와 자유가 그리웠다. 울분에 가득 찬 격리를 하는 것은 내가 혼자가 아니었는지, 간혹 호텔에서 늑대인간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기도 했다. 이 때는 핼러윈이 아니었음을 미리 밝힌다. 우리가 격리 호텔에서 퇴소할 무렵이면 사회 부적응자, 성격파탄자가 되어 사회로 돌려보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지도 못할 밖을 바라보며 매일같이 스케줄러의 해당 날자에 빗금을 그으며 빗금이 그어진 네모가 열네 개가 될 날만 기다렸다. 처음에는 격리하면서도 자기 관리를 손에서 놓아버릴 수는 없다며 몇 가지 계획을 세웠다. 하루에 플랭크 2분, 스쿼트 100개, 하늘 자전거 20분. 가히 야심 찬 계획이었다. 이 스피릿이라면 이듬해에 철인 삼종 경기에 출전하거나, 아니면 갑자기 주커버그, 베조스, 머스크를 능가하는 사업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각 목표 옆에 자그마한 네모를 그려두고 그 목표를 달성하면 네모에 체크를 하고 줄을 확 그어버릴 셈이었다. 그리고 세 개를 다 체크한 날에는 근처의 한식당에서 김치볶음밥을 주문해서 먹자며 다짐을 굳혔다. 성과에는 마땅한 보상이 필요한 법이니까! 이제 와서 자백하건대 나는 네모에 하나도 체크하지 않은 날에도 김치볶음밥을 주문해 먹었다. 역시 한국인의 정신 건강은 밥심에서 오고, 인덕은 탄수화물에서 비롯된다 하지 않는가. 아차 하면 테크 빌리어네어의 길을 걸을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보다는 당연히 인격이 삐뚤빼뚤한 인간이 되지 않는 것이 먼저니까. 사실 동양 철학에서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 하지 않는가. 아이언 맨보다 더 역겨울 정도의 부를 축적한 세계 최초의 트릴리어네어가 되려면 아무래도 김치볶음밥을 통해 나의 인격부터 수양해야 했다. 나도 안다, 거기서 수신의 신은 몸 신인 것. 하지만 거기서 신은 육체를 뜻하는 신이 아니라 나 자신을 뜻하는 메타포라고 해석하기로 하자. 하도 같은 호텔에서 같은 투숙객이 김치볶음밥 일 인분을 연달아 먹어서 그랬는지, 식당도 내가 격리 중인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어느 날부터는 식사 배달에 막대 사탕이나 밀키스 같은 간식거리가 같이 배달되었다. 나는 배달 어플에서 팁을 더 추가하는 것 외에는 달리 감사함을 표할 방도가 없었다.


격리 김치볶음밥.jpg 아직도 감사한 마음에 잊지 못하는 한식당 마루의 김치볶음밥

아무리 내가 사랑하는 김치볶음밥과 함께한다 한들, 격리는 격리였다. 창 밖을 내다보는 것이 나의 최대의 기쁨이었는데, 어느 날부터는 창가 저 멀리에서 매일같이 날아다니는 새들을 발견하게 됐다. 분명 비둘기가 아니었다. 몸집도 꽤나 크고 다크 코코아색이었다. 홀로 날아다니며 하늘을 둥글게 둥글게 원을 그리며 날았다. 비둘기처럼 날개를 계속 푸드덕푸드덕 거리지 않고, 두 날개를 곧게 쭉 뻗은 채로 유수풀에서 튜브를 탄 상태로 둥둥 부유하는 사람들처럼 날았다. 아마 날개의 동력을 이용하기보다는 기류를 읽고 그에 몸을 맡기는 모양새였다. 어쩜 저리도 힘들이지 않고 날 수 있는지 경이로웠다. 나는 비행기를 한 번 타려면 양국에서 격리를 하느라 갖은 고생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매일같이 내 눈에 들어오니 이름을 알고 싶었고, 격리 중이어서 시간이 넘쳐나던 나는 홍콩에서 자생하는 새들의 종류를 하나하나 찾아보았다. 저어새는 하얗고 부리가 기니까 아니고. 비둘기는 당연히 아니고. 큰소쩍새는 부엉이같이 생겼으니 아니고. 그렇게 한참을 뒤지다 마침내, 창밖에서 나를 약 올리듯 자유로이 비상하는 존재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솔개2.jpg 석양 속으로 날아들고 있는 솔개 한 마리


솔개, 혹은 소리개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매목 수리과의 조류. 다른 맹금류의 새들과 달리 무리 생활을 하기도 한다고 알려졌다고 한다. 호주 등지에서는 먹잇감을 더욱 쉽게 사냥하기 위해 방화를 하기도 한다고. 그래서 호주에서는 솔개를 보면 산불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간혹 솔개가 내 호텔방보다도 훨씬 높은 곳에서 날고 있어서 그 모습은 안 보이고 그림자만 보일 때도 있었다. 솔개의 그림자는 자못 컸다. 서양 사람들이 왜 날아다니며 불을 뿜는 용을 상상하게 되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저렇게 커다란 그림자가 날갯짓하고 지나갔는데, 그 자리에서 불이 난다면 용과 같은 강력한 생명체를 상상해봄직 하다.


예전에 영국의 코츠월드에서 맹금류 보호소를 방문하여 맹금류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보호소에서 일하던 분께서는 새들에게 나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이므로, 맹금류 새들은 먹이 사냥 등 확실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면 비행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사냥 실력이 별 볼 일 없는 것인지 몰라도, 격리 호텔 근처의 솔개들이 뭐라도 하나 낚아챈 것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어딜 향하는 것인지 불분명했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기는 한 것일까? 왜 스프링처럼 원을 그리며 위로, 위로 비상하기만 하는지. 아무리 시력이 좋다 한 들, 높이 올라갈수록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일 텐데. 솔개들은 석양이 하늘을 물들일 무렵이면 어김없이 내 방 근처에서 원을 그리며 날아다녔다. 그 좋은 시력으로 나를 보기는 했을까? 아니면 호텔의 유리 창문 너머는 볼 수 없었을까? 어쩌면 그들은 나를 약 올리려한 것이 아니라 격리 기간동안 벗을 해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하늘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노을도 좋았지만, 나는 솔개의 비행을 보느라 넋을 놓고 창가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딱히 목적 없이 날아다니는 것만 같은 솔개들을 보며, 나도 뚜렷한 목적 없이 그들을 바라봤다.


격리 해제가 되는 시간은 하늘이 수줍은 소녀의 미소처럼 발그레하게 물드는 시간이 아니었다. 격리가 해제되는 것이야 기쁘기 그지없었지만, 솔개들에게 작별을 고해야 하는 것은 왠지 아쉬웠다. 다행히 솔개들은 호텔 밖에서도 마주칠 수 있었다. 나는 격리가 끝나고도 홍콩을 떠나는 그날까지 종종 솔개들을 찾아 케네디 타운이나 사잉푼 항구 산책로를 오갔다. 해가 질 무렵이면 여지없이 원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솔개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홍콩에서 마지막으로 거주한 집에서도 간혹 솔개가 보였다. 나는 솔개에게 많은 관심을 쏟아부었지만, 솔개는 지상에 있는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물론 그게 다행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창문이 열린 사이에 우리 집에 들어온다면? 나는 분명 비명을 고래고래 지르며 119에 전화를 걸었을 거다. 그러니 솔개는 하늘에, 나는 땅 위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마땅했다.


힘들이지 않고 별 이유도 없이 홍콩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아 보였던 솔개들. 나는 그들보다 더 자유로운 존재들을 알지 못한다. 홍콩에서 사는 동안 나는 그들처럼 자유로워지길 소망했다. 홍콩을 떠나 자유를 누리고 있는 지금, 내게 자유의 상징이 된 솔개들은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들을 또 다른 방식으로 기리기도 한다. 내게 그들의 비행은 스프레차투라 (sprezzatura) 그 자체였다. 스프레차투라란 이탈리아 단어로 어려운 것을 어려워 보이지 않게 해내는 멋짐 혹은 우아함을 뜻한다. 너무 힘을 팍! 주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날에는 홍콩의 솔개들, 그리고 그들의 스프레차투라를 떠올린다. 우리는 날개가 없는 이족보행의 존재들이니, 허리와 어깨라도 펴고 우아하게, 멋지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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