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 성인 서른 명 쯤과 워크숍 중이었다. 코로나로 그룹 워크숍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꿈에 나올 지경이 될 정도로 그룹세션이 그리운 것도 사실이다. 그룹의 에너지는 만나기 전까지 예측하기 어렵고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늘 두렵고 떨리지만 그만큼 설레고 나를 채워주는 에너지가 그득하다. 꿈에서 만난 그들과 신나게 춤을 추고 이야기하며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워크숍이 거의 끝날 즈음 유독 움직임이 좋고 적극적인 여성분께 나의 움직임을 넘겼는데 그 분이 꿈에 그러더라.
“저요? 저 춤 못 춰요”
많은 사람들이 실컷 움직이고 나서도 본인은 춤을 못 춘다고 말한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전 만 3년을 강원도에 부대라는 부대는 모조리 찾아다니며 춤을 춘 적이 있다. 보통 관심병사를 위한 세션이었지만 일반 병사가 함께 한 그룹들이었다. 갈 때마다 너무 재밌고 감동적이었던 기억으로 가득 차있다. 물론 만나기 전에는 때마다 멀미날 정도로 피하고 싶은 두려움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들과 둥글게 서서 손목을 털고 목을 돌리고 발목도 돌리고 하면서 체육시간을 가장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나면 본격적으로 리듬에 맞춘 움직임들이 진행된다.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가 다 잘한다. 여러 가지를 자기방식으로 자기 생각대로 움직임을 진행하고 나서도 놀라운 건 자기들은 춤은 못 춘다는 것이다. 대체 사람들이 생각하는 춤이 뭐길래 이토록 이들에게서 자신감을 빼앗아버린 것인지.
그 때 군부대에서 “얘는 춤을 잘 춘다”라는 ‘얘’가 있었다. 그 친구는 입대 전 힙합을 하던 친구였다. 엄청 잘 돌고 중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앉았다 일어나고 신체의 한 부분으로 도는 것도 모자라 거꾸로도 막 돌고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동료 병사들의 ‘와’하는 탄성을 한 몸에 받던 친구였다. 물론 잘 추었다. 그런데 과연 그것만이 춤일까? 사람들은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움직임을 춤이라고 생각한다. 특정인들이 특정교육을 받아 특정장소에서 기교적으로 보여주는 움직임이 춤이라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은 이 세상에 엄청 많은 온갖 꽃 중에 장미만 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다 보니 기껏 지금까지 열심히 엄청 훌륭하게 추던 춤도 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면 온 몸이 얼음이 되며 그건 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장미도 꽃이고 열매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과꽃도 꽃이고 아무도 봐주지 않는 길에 풀꽃도 꽃이다. 어떤 것이 더 가치 있고 더 예쁘고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움직임을 하는 사람들 중에 누구는 잘 추고 누구는 못 춘다고 말할 수 없다. 엉거주춤하게 발만 왔다갔다 했더라도 리듬에 맞춰 박수만 쳤더라도 그 순간의 자기가 담겨있으면 춤이 된다. 오히려 온갖 기교를 부리면서 자기가 없는 것, 진심이 담기지 않은 것, 삶의 향기가 없는 것이 춤인지 물어볼 일이다.
아직도 춤을 못 춘다고 말할 것인가? 숨을 쉴 수 있다면 누구나 춤 출 수 있다. 화가 날 때 긴 한 숨을 쉬었다면, 위로가 필요한 사람의 어깨를 보듬어 주었다면,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와락 안아보았다면 악수를 위해 손이라도 내밀어 보았다면, 아슬아슬한 스포츠경기를 보며 발을 동동 굴러보았다면, 간절한 소원으로 두 손을 모아보았다면 움직임으로 자신을 표현할 준비가 된 것이다. 이제 리듬에 맞춰 손가락부터, 발가락부터 움직여 보면 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