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주는 힐링,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
<사랑한다고 말해줘>
-한국 / 로맨스 / 16부작
-지니 TV, ENA, 디즈니플러스 11월 27일(월) 첫 공개
-연출: 김윤진, 각본: 김민정
-출연: 정우성, 신현빈
휴식이 필요했던 어느 날, 이른 저녁 누웠으나 오히려 너무 피곤해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뭐라도 잠깐 보다 잘 요량으로 <사랑한다고 말해줘>를 틀었는데,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오프닝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연출에 눈앞이 신선해졌다. 로맨스는 역시 제주도인가? 제주도의 소소하고 감성적인 장소들에서 찍은 도입부의 이미지들이 아름다우면서도 깔끔하다. 뭔가 미니멀한 감각, 딱 필요한 것만 보여주려고 한다라는 느낌이 드는 화면이었다.
요즘 사람들에게 정우성 주연의 멜로가 먹힐까? 하는 궁금증이 들기는 한다. 나 또한 ’정통멜로‘라니, ’16부작‘이라니 플레이를 하기까지 망설임의 시간이 있었다. (요즘은 16부작이 왜 이리 길게 느껴지는 걸까.) 게다가 오프닝 타이틀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드라마의 템포가 느리고, 조용하다. 청각을 상실한 화가 차진우(정우성 분)와 무명배우 정모은(신현빈 분)의 사랑 이야기이기에, 그들의 대화는 조용하고 느리게 이어진다. 수어를 하거나, 필담을 하거나,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하는 입모양을 보고 대화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더 귀 기울여서 듣게 될 때가 있다. 이 드라마도 약간은 그런 면이 있었다. 천천히, 조용히 하는 대화에 나도 모르게 귀 기울이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 ‘대사’가 던지는 질문들에 집중하게 된다. 극 중 모은이 진우와 비 내리는 풍경을 함께 보다가, 두 손으로 귀를 막고서 소리 없이 오는 비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이처럼 모은이 경험하는 조용하고 느린 시간들을 시청자인 나도 함께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이 생각보다 편안하고, 힐링이 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필담을 나누는 장면에서 들리는 사각사각 연필의 소리, 수어로 투닥거리면서 조용하게 격해지는 감정들, 조용한 대화 속 배우의 표정에 집중하게 되는 경험은 정서적으로 뭔가 채워주는 느낌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드라마를 즐기지만, 그 기저에는 단순히 시간 때우기나 오락만 있는 게 아니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며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정서를 체험하고, 인생의 여러 가지 질문들에 대해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답해보고, 인생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을 형성하고 싶어 한다.
로버트 맥키는 <시나리오란 무엇인가>에서, ”엔터테인먼트를 즐긴다는 것은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만족스러운 결말에 도달하게 하는 이야기의 의식에 푹 빠져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는 건 그 이야기의 의미와 감정에 빠져보는 것이고, 때로는 그 의미와 갈등이 깊어져가며 고통스러워지는 감정조차도 경험해 보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이러한 “이야기의 의식”에 푹 빠지기 좋은 드라마라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가 주는 힐링의 순간들, 드라마가 던지는 인생의 질문들을 온전히 곱씹게 되는 시간들이었다.
극 중 진우가 담벼락에 그린 벽화. 그림자처럼 희미한 색으로 그려진 구부정한 뒷모습은 진우를 참 많이 닮았다. 드라마의 분위기와 이야기에 너무 잘 맞는 그림이었던 것 같다. 실제 그림을 그린 한지민 작가의 평소 화풍이 잘 어우러진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진우와 서경의 모습도 풋풋하고 아름다웠다. 전체적으로 배우들의 의상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시각적으로 포인트가 되었는데, 특히 모은은 노란색을 많이 사용한 게 보였다. 제주도 로케이션에서의 노랑 스카프, 평소 메고 다니는 노랑 배낭 등 밝고 깨끗한 이미지와 함께 영상에서 포인트가 되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