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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IN May 02. 2023

100번째 글



백 번째 글을 썼다. 어제.

사실, 뭐 그런 거에 큰 의미를 두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100'이라는 숫자는 왠지... 특별하니까.


그래서 좀 멋들어진 글을 써서 올리고 싶었다.

뭔가... 좀 있어 보이고, 시크해 보이고, 세련돼 보이고, 지적으로 보이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뭐 그런.


100번째에 어울리는 글이 뭘까 한참을 고민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그런 글은커녕, 주저리주저리 헛소리 같은 혼잣말만 읊어댔다.

질척이고 흘리고 불투명한, 그래서 부끄럽고, 그래서 망설여졌던 그런 글


나는

어제의 감정과 다른 글을 쓸 수 없었다.

또 이미 저장된 여러 편의 글들이 있었지만

어제의 나와 다른 글을 올릴 수도 없었다.


그건 왠지 거짓말 같아서.

현실의 나와 글 속의 내가 다른 것은 반칙 같아서.

껍데기 같아서.

그래서 그럴 수는 없었다.



< www.pexels.com >



내가 처음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2018년 11월이었다.

이전에도 글을 쓰지 않은 건 아니지만 여기저기 저장 매체를 옮겨 다니며 그 글들은 자꾸만 휘발되었고,

지속성이 없으니 깊이도 무게도 의지도 가벼워지는 듯했다.

무언가 제대로 된 마당에서 진득하게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십여 년 전에 쓴 글을 퇴고해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2018년부터 새롭게 쓴 글들을 이어갔다.

공을 들여 글을 지었다. 아니 썼다. 그리고 한 편, 두 편, 글이 완성되면 이 공간에 보관했다.

냉장고에 생고기를 한 팩 두 팩 쌓아두는 것처럼, 가을 지나 쌀포대를 차곡차곡 저장해 두는 것처럼 든든했다.

브런치 메인에도, 다음 메인에도 여러 번 글이 올라갔다.

그 이후 몇 년, 아주 주기적이지는 못해도 드문드문 글을 써오다 어떠한 이유로 글은 멈췄다.

몰입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글과 바꿔야 하는 일상이 많아지면서 고민이 깊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을 쓰는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올해 2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2월 말, 글을 업로드하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매일 한 편의 글을 올리고 있다.

그것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와 약속을 한 것도 스스로 다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그냥 그렇게 되었다.

보잘것없는 글이지만 그 글들이 나를 끌고 갔다.

그렇게 쌓인 글이 어제로 딱 100편이 되었다.



< www.pexels.com >



나는 지나간 글들은 잘 보지 않는다. 아니 잘 보지 못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글을 쓰는 시점에는 여러 날 동안 여러 번 반복해서 읽지만 내 손을 떠나고 나면 대부분 더 이상 읽지 않는다.

현재의 감정으로 그 글을 쓴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숨차다. 그때의 기억과 감정을 끄집어내는 것도 힘에 부친다. 현재를 살기에도 숨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2월부터 다시 글을 쓰기로 하면서 또 3월, 4월 글을 쓰면서 지우고 싶은 예전 글들이 있었다.

다시 꺼내어 읽어보고 재- 퇴고를 해야 하지 않나 걱정되는 글들도 있었다.

지금은 감추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은 숨기고 싶은 글 솜씨이기도 해서 여러모로 부끄럽고 민망한 그런 글 말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그런 고민이 덜 할 텐데 신기하게도 몇 년 전 글들은 매일 읽히고 있다.

많은 조회 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 누군가에게는 읽히고 있다.


그런데... 나는 결국 어떤 것도 수정하지도, 삭제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 민낯을 맞닥뜨리는 것이 두려워 거의 읽어보지도 못했고 말이다.

언젠가 용기 내어 다시 읽어보기는 하겠지만 앞으로도 수정이나 삭제는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브런치는 공개된 공간이다. 나 혼자만 보는 글을 쓰는 곳이 아니다.

이곳에 글을 써서 세상에 꺼내어 놓는 순간, 그 글은 오롯한 나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예술이 그렇다고 여긴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음악을 만드는 음악가도, 소설을 쓰는 소설가도, 또 그 어떤 창작을 하는 사람도

그건 그 사람의 작품이기도 하겠지만 어찌 보면 그건 그를 모체로 한 태생일 뿐이지 '그'만의 작품은 아닌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걸 보는 이가, 그걸 듣는 이가, 그걸 읽는 이가 만들어가는 또 다른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걸 지은이라고 해서 함부로 고쳐서도, 함부로 지워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조금 못난 자식, 조금 잘난 자식, 그 무게를 따지고 계산하여 품지 않듯이

조금 못한 글, 조금 나은 글, 그 모두가 나의 뱃속에서 나온 아이들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앞으로 써가는 글들도 그러할 것을 안다.

어떤 날은 화창한 글, 어떤 날은 폭풍우 치는 글, 어떤 날은 알 수 없는 구름만이 가득 낀 글.

어떤 날은 보여주고 싶은 글, 어떤 날은 꽁꽁 싸매어 묻어 버리고 싶은 글, 어떤 날은 고이 접어 전해주고 싶은 글을 쓰게 되겠지.

중요한 것은 나는 계속 글을 써갈 것이란 거고, 그 글로 끊임없이 나와 너에게 말을 걸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퍼내어도 퍼내어도 더 퍼낼 수 있는 말들이 있다는 것에 아직 감사한다.

수다쟁이가 아닌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나, 수다쟁이였던 걸까?



< www.pexels.com >



이 브런치에 몇 번째 글까지 이어지게 될지 알 수는 없다.

할 말이 없게 되거나,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게 되거나,

혹은 아무도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멈추게 되겠지.

다만 나는 오래오래 이곳에서 숨 쉬고 싶고, 당분간은 쭉 이 안에 잠수해 있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오늘 101번째 글을 쓰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 본다.


기특해.

잘했어.


더불어, 같은 공간에서 글을 쓰는 모든 이들이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꺼내어 계속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곳이 더 알록달록 선명한 유채색의 글 밭이 되기를 바라본다.


모든 글 쓰는 이에게

존경과 찬사 그리고 감사를 보냅니다.

진심을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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