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폰을 보니 우체국 택배다. 그냥 놓고 가실 생각이 없으시다. 하... 마음이 바빠진다.
“네~”
대답을 하고 의자에 걸쳐놓은 후드티를 서둘러 입는다. 문을 열자 내 입에서 반사적인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이내 기다리고 계신 아저씨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아... 음...”
단감, 그것도 무려 10kg으로 3박스다.
수취인의 이름을 확인하는 아저씨의 물음에 제대로 듣지도 않고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단감이라면 택배송장에 적힌 수취인이 누구든 간에 내 집에 온 것이 분명하고 그것을 보낸 이가 누구인지도 자명하다. 더욱이 저것이 진영단감이라면 말이다.
단감이 이제 끝물인가 보다. 한꺼번에 세 박스나 보낸 걸 보면 말이다.
순간 설핏, 명치 아래에서 짜증 같은 것이 꿈틀거린다. 꼬맹이 둘과 어른 둘, 이렇게 단출한 네 식구가 사는 집에 30kg의 단감이라니. 그것도 과육은 이미 충분히 익을 대로 익어 언제 홍시가 될지도 모를 말랑말랑한 것들일 텐데... 하... 저걸 언제 다 먹으라고...
수레를 끌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시는 아저씨를 두고 단감 박스를 문 안으로 차례차례 옮긴다. 나란히 3박스를 쌓아놓고 아저씨께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고개를 돌려 박스에 붙은 송장을 삐뚜름하게 내려다본다.
발신인 - ○○농장
기계로 인쇄된 송장에는 언니네 농장 이름만이 덩그렇다. 푸른 잉크가 물든 송장에서 건조한 늦가을 바람이 휙- 하고 스쳐간다.
수취인 - 딸아이의 이름
수취인 전화번호 - 남편의 번호
어디에도 같은 성을 가진 그녀의 이름이나 내 이름은 없다. 전화번호 같은 것도 없다. 손으로 쓴 무엇도 없다. 물론 미리 온 전화나 메시지도 없었다.
어째 씁쓸한 피 맛이 혀 끝을 찌르르 찌른다.
그녀와 나는 열 살 터울의 자매이다.
그녀와 나는 형제 많은 우리 집에서 그나마 가장 마음을 나누었던 핏줄이다.
그녀와 내가 한 집에서 살았던 날들의 기억은 별로 없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녀가 직장을 찾아 집을 떠나고 난 후의 모습이다. 어쩌다 휴가를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모습이 텃밭에 홀로 핀 꽃처럼 화사했고 그녀가 머무는 몇 날의 집 안 공기는 내내 푸근하고 따듯했었다는 것, 오는 걸음의 그녀는 언제나 나에게 선물을 안겼고 다시 가는 걸음에는 잊지 않고 용돈을 챙겨주었다는 것. 그 모든 것의 풍족함으로 나는 언제나 그녀가 집으로 오는 날을 기다리고 기다렸었다는 정도이다.
내가 아직 12살이고 그녀가 22살일 때, 그녀는 서울에서 제 힘으로 벌어 살고 있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그녀는 도시로 상경해 꽤 그럴듯하게 살고 있는 멋진 여성이었다. 그녀에게서는 도시의 끄트머리 같은 묘한 공기가 묻어났다, 말투는 고향을 잊은 지 오래였고 화장은 옅었으나 정갈했으며 입은 옷들은 세련되었다. 100원짜리 동전도 자주 가질 수 없었던 시절의 내 눈에 그녀의 지갑은 언제나 두둑한 금고 같았다. 나를 대하는 눈빛은 친절했으며 건네는 말투는 상냥하고 나긋했다. 언제고 내가 먹고 싶은 간식이 없는지 살폈고 먹어보지 못한 것들을 기꺼이 내어주었다. 그녀는 내게 든든하고 배부른 천사 같았다.
그해 겨울, 방학이 되자 그녀는 나를 서울로 불렀다.
새마을호 기차였는지 무궁화호 기차였는지, 완행버스였는지 고속버스였는지는 기억할 순 없지만 달뜬 마음을 부여잡고 꽤 먼 거리를 꽤 오랜 시간을 달려(300km이 넘는 거리를 달려) 나는 그녀의 도시로 갔다.
그녀의 집은 공단들이 모여 있는 도시 외곽의 낡은 기숙 아파트였다. 5층의 나지막한 동들이 줄지어 있었고 아파트 이름과 동이 쓰인 페인트는 말라서 떨어져 나갔다. 여자들만 살거나 드나들 수 있는 그곳은 금남(禁男)의 집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며 두 명의 동료와 더불어 방 두 칸을 나누어 살고 있었다. 문을 열 때마다 끼-이-익- 소리가 나던 그녀의 방에서는 익숙한 비누 냄새가 났다. 두 명이 나란히 누우면 꽉 찰 것 같은 좁은 방 한쪽에 낡은 대야와 빨랫비누가 있었고, 책상 위엔 제목도 낯선 모서리가 해진 책들이 가득했다. 무작정 탐이 나던 그 책들을 요리조리 뒤적이다 툭- 하고 떨어지는 무엇을 보았다.
'학위증' '○○대학'
학위증을 처음 보았던 나는 그것의 정체에 대해서 오래고 깊게 생각했다. 그녀는 직장을 다니면서 하고 싶던 공부를 끝냈나 보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때 나는 아주 많이 놀랐다. 책도 좋아하고 공부도 좋아했던 언니. 대학 공부란 걸 제 힘으로 말없이 해낸 언니. 형용할 수 없는 존경과 감탄이 심장을 타고 몸속에 뜨끈한 공기를 훅- 불어넣었다.
그녀의 쉬는 날, 우리는 지하철을 탔다.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남대문시장’이었다.
지금도 나에게 남대문 시장은 여전히 미아 되기 십상인 곳이지만 1980년대의 그곳은 마치 엘리스가 뛰어든 또 다른 세상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어린 내 눈엔 모든 것이 너무 크고 많고 시끄럽기까지 해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지도 못할 만큼 주눅이 들었었다. 졸레졸레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뒤통수만 보면서 나는 뜨끈한 어묵도 먹고 번데기도 먹고 호호불어 풀빵도 먹었다. 든든히 요기를 채우고는 그녀의 손에 낚여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골목의 즐비한 옷가게들을 누볐다. 그녀는 눈으로 훑은 옷들을 골라 옷걸이 째 내 가슴 앞에 처억! 대어 보았다. 시선은 여전히 옷에 고정한 채 재빠르게 품과 길이를 가늠하면서 마음에 드냐고 물었고, 무엇이든 마음에 들었던 나는 “응... 좋아” 끄덕끄덕만 반복했다. 그 옷이 어떤 옷이든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산 옷을 ‘서울’은 티브이에서만 보던 사람들이 사는 남쪽 끝 고향에서 입는다면, 그 옷을 입고 학교에 가게 된다면, 또 그 옷을 입고 봄 소풍이라도 가게 된다면 나는 동네에서, 학교에서 최고의 패셔니스타가 될 것이 분명했기에 마음에는 안달이 일었다. 옷을 고르고, 흥정을 하고, 냉정하게 돌아서고, 또다시 옷을 골라내 내 앞에 척척 들이밀던 그녀는 진짜 어른 같았다. 그 어른 뒤에 숨어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어쩌면 그녀는 호리병에서 튀어나와 색색의 솜사탕을 안겨주는 지니일지도 몰랐다.
12살의 나와 22살의 그녀는 그랬다.
언니였지만 엄마였고 멀지만 애달픈 핏줄이었고 아직 어린아이와 일찍 세상에 나온 어른, 그것이었다. 그것은 아련한 위로였다.
두 아이를 다 길러내 돌볼 것이라곤 저를 낳은 어미만 남은 그녀와 봄이거나 여름쯤 파릇하게 자라고 있는 어린 자식 둘을 키우고 있는 또 다른 어미가 된 나는 이제 연락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서로의 이름을 부르거나 호칭을 부르지 않고 전화나 문자를 확인하지 않는다. 명절에 안부를 묻거나 생일을 축하하지 않으며 조카들의 커가는 모습이나 궁금함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우리는 태초에 서로에게 연결되었던 고리를 끊고 각자의 세계에 연결된 무엇으로부터도 비켜가는 중이다.
몇십 년을 건너온 그녀와 나의 사이에는 숱한 언어와 역사가 있고, 그날들이 쌓여 그녀의 메시지는 나에게 짐이 되었으며 내가 보낸 메시지는 그녀에게 배신이 되었다.
그것은 오롯이 그녀와 나. 둘만의 세계가 아니며 각자가 끌어안아야 하는 또 다른 세상 안에서의 번뇌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