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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IN Oct 22. 2023

시대적 난독증

글자는 읽는데, 글이 안 읽혀요.



거의 모든 의사소통을 카카오 톡으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이다.

개개인 간의 연락에서부터 회사 내 업무, 학교나 갖가지 관공서와 단체들의 알림, 온갖 쇼핑 정보와 의료 정보, 은행 업무까지. 공적이든 사적이든 카카오 톡 없이는 사회생활,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이 정도면 아마도 초등학생부터 연로하신 어르신들까지, 대한민국에 살고 있고 휴대폰을 가진 거의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애플리케이션이 카카오 톡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목소리를 듣는 통화나 용건만 간단히 보내는 문자 메시지보다 카카오 톡을 선호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이니 카카오 톡의 편리함과 접근성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테고, 오늘은 그 카카오 톡의 과잉으로 인해 느끼는 새로운 문제와 그로 인한 피로감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 pixabay.com >





난독증 [dyslexia]


난독증(dyslexia)은 글을 정확하고 유창하게 읽지 못하고 철자를 정확하게 쓰기 힘들어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학습 장애의 한 유형으로 읽기 장애라고도 한다정확하지만 많이 느리게 읽는 경우도 난독증으로 진단할 수 있다. 난독증의 진단기준이 자주 바뀌다 보니 아직도 수십 가지 서로 다른 진단기준이 사용되고 있어 진단기준의 일관성이 부족한 편이다.


좁은 의미의 난독증은 독해 능력은 정상이나 글자를 소리로 바꾸는 해독능력에만 문제가 있는 경우를 말하지만 일반적 의미의 난독증은 독해 능력에 상관없이 해독 능력의 문제가 있는 모든 경우를 포함한다. 유창하게 읽지 못하면 독서량이 줄어서 나중에 어휘력과 이해력도 저하될 수 있다.


지금까지 난독증은 원인이 아직 안 밝혀져서 확실한 치료방법이 없는 병이라거나 영어권에서만 있는 병, 치료를 할 수 없는 병, 글자를 거꾸로 읽는 병, 천재성도 함께 가지게 되는 병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현재 난독증은 많은 연구가 되어 그 정체가 거의 밝혀진 병이며 우리나라에도 영어권과 마찬가지로 5% 정도의 난독증 환자가 있고 그들도 조기에 진단받기만 하면 큰 어려움 없이 치료된다고 알려져 있다.


< 출처_네이버 지식백과 >

   난독증 [dyslexia]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서울대학교병원)





'난독증'의 의미를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의학 용어로 위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 내가 말하고 싶은 '난독증'은 의학적, 과학적 의미의 난독증이 아니라 일종의 '시대적 현상' 같은, 현실 세계에서 느끼는 '사회적 난독증'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 이 말은 내가 지어낸 용어이다. 아무리 봐도 지금이 그러한 시대 같아서 말이지.

똑같은 모양으로 기호화된 글자를 똑같이 조합해 쓰고 있지만 어쩐지 글자는 읽는데 글은 읽지 못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같은 언어를 쓰고 있지만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는 꼭 사람 면면의 문제라고만 보기보다 활자가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으나 진지하고 긴 글의 경험은 점점 줄어들고, 또한 얼굴을 마주해 표정을 읽는 대신 가볍고 편한 언택트를 선호함에서 오는 부작용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 pixabay.com >



지금의 시대는 어찌 보면 예전보다 더 많은 글과 글자를 읽는다고도 볼 수 있다. 깊이의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 단순히 글자로만 보면 말이다.

내가 살아왔던 시대를 곱씹어보면 글자라곤 활자판에 잉크가 묻혀 찍혀 나오던 시대에서부터 필요시에만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그 안의 정보들을 읽거나 문서를 작성하던 시대로, 그러다 스마트 폰이라는 작은 컴퓨터를 각자의 손안에 지니고 다니는 시대까지 변화하게 되었으니 현재는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어떤 순간에라도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서로 간의 연락도 카카오 톡을 매개로 숱하게 오가는 단문의 글자들로 이루어지니 눈 떠서 눈 감을 때까지 우리는 글자의 홍수 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글자들을 읽음에도 서로 간의 소통에는 삐걱거리는 지점이 생기곤 하는데, 하루에도 여러 명과 카카오 톡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싶은 순간들이 있다.

혹은, 내가 보낸 메시지를 나의 의도대로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고 다르게 이해하여 엉뚱한 반응으로 되려 나를 당황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하는 생각은 뭐 이런 게 되겠지.

아니,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이것이 쓰는 사람의 쓰기의 문제인 것인지, 읽는 사람의 읽기의 문제인 것인지 혹은 서로 간의 환경과 문화, 생각의 차이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확실히 글자는 읽지만 글을 제대로 읽어내기는 힘든 순간들이 생긴다는 거다.

만나서 나누는 이야기이거나 목소리로 전해지는 말들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되고 납득이 갈 법한 상황들도 글자 안에 표정이 없고 눈빛이 없고 말투가 없고 어감이 없으니 그걸 유추해 내는 각자의 그릇이 달라 거기에서 오는 오해들이 종종 생기가 된다.

말 줄임 뒤에 생략된 말들을 전달하기가 어렵고 비유적이거나 함축적으로 표현한 단어들은 그 진짜의 의미를 찾아내기가 녹록지 않다. 농담이나 장난조차도 글자에 뉘앙스를 담기가 힘들어 그 유쾌함이 제대로 오가기 쉽지 않으니 핑퐁처럼 대화가 이어지다가도 일순간 적막이 감돌기도 하고 그 침묵 사이에 흐르는 진실을 유추하느라 감정을 써야 하고... 이에 자꾸만 글자 뒤에 무언가를 첨언하고 부연하게 된다.



< pxhere.com >



그래서 파생된 상품이 바로 이모티콘인데, 비교적 젊은 세대들은 이코티콘 사용에 능숙하고 즐겨하는 듯하지만 나는 그 사용에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는 편이다. 한동안 부지런히 해보기도 하였으나 일일이 이모티콘을 찾고 고르는 것이 너무 번거롭고 시간도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한 문장을 쓰는데 드는 에너지 보다 이 순간에 가장 적절한 이모티콘을 찾는데 드는 에너지가 더 컸다.

    

나와 카카오 톡을 주고받는 사람들만 비교해서 보면 이모티콘을 적극 활용하는 세대는 30대까지인 듯하고 40대부터는 뒤로 갈수록 점점 그 사용 횟수가 줄거나 혹은 거의 쓰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앞서 말한 오해들이 생길만한 문장 뒤에는 이모티콘 대신 내가 그 말을 왜 했는지, 이 단어는 어떤 뜻인지, 지금 이걸 왜 묻는 것인지, 등을 자꾸만 설명하게 된다.


예를 들면 ', 이거 지금 따지는 거 아니야.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응. 이 말은 내가 지금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전에 그런 상황이 있었다는 뜻.'

'이거 너한테 하는 말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인 거 알지?' 등...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본 내용보다 그 말의 배경을 주섬주섬 설명하는데 들이는 에너지가 더 크다니...

아이러니가 아닌가?



< pxhere.com >



신문, 방송, 인터넷 등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매체 언어'라고 하는데 매체에 따라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뿐만 아니라 소리나 그림, 동영상, 몸짓, 음악 등 다양한 기호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는 사실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니고 말과 글의 중간쯤으로 본다.

지금의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이 '매체 언어'를 교육받고 수학능력 검정시험에도 출제가 되는데, 매체에서 사용되는 언어, 매체를 이용한 소통, 매체 안에서 언어를 사용하는 올바른 방법 등에 대해 배운다.

그럼에도 글로 하는 소통은 말로 하는 소통보다 더 상위에 있는 소통 법이기에 카카오 톡에서의 소통 또한 말을 하는 것처럼 쉽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걸 문해력의 상실로 보아야 할 것인지 독해력이 모자람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고민을 해보기도 하였으나 꼭 그것은 아닌 것 같다는 나름의 결론이다.

'문해력'이나 '독해력'의 문제는 사실 최근에 MZ 세대의 등장 이후 대두된 문제이고 그 이전 세대에서는 그것이 크게 부각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문해력과 독해력에 큰 문제없이 성장하여 지금의 나이가 되었다는 것일 텐데 유독 비대면의 카카오 톡으로 소통을 하면 이런 오해들이 생기곤 하니 말이다.




문해력 (文解力) -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

독해력 (讀解力) - 글을 읽어서 뜻을 이해하는 능력


엄격히 구분하자면 두 단어는 다른 뜻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비슷한 의미로 혼용하여 사용된다.

'독해력'이 조금 더 깊은 사고를 요하고 고차원의 사고수행능력 또한 필요하다.

이는 긴 글이나 깊이 있는 글, 전문 지식 등을 읽고 이해할 때 요구되는 능력이다.

일상생활과 일반적인 대화의 글에서 필요한 것은 '문해력'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시대적 난독증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 쓰기의 말들 _ 은유 / 유유 > 



위 내용은 사실, 일반적인 대화는 아니고 글쓰기에 관한 내용이긴 하지만 카카오 톡에서라고 다를 게 있을까 싶은 생각이다.



최대한 쉽고 단순하게 말하고 내가 아는 것이니까 상대방도 당연히 알겠지. 하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한다. 상대방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해 사전 배경 지식이 없다는 전제하에 설명해야 한다.

그러니까 오만을 부리지 말고 친절하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상의 가벼운 이야기들은 카카오 톡으로 나눌 수 있지만 조금 더 깊고 진지한 이야기는 역시 얼굴을 마주하고 하는 것이 최상이다.

글자에 콕콕 박힌 사실이나 정보 말고, 만났을 때에만 전해지고 받아들일 수 있는 글자 이상의 그 무엇이 반드시 사람에게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오해하기 쉬운 상황에 있거나 오해 없이 제대로 전달해야 하는 신중한 대화일 때는 더욱 카카오 톡으로의 대화는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음으로 가벼운 카카오 톡으로의 대화이더라도 최대한 한글의 문법에 맞게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이 한국사람 대다수가 인지하고 있는 보편의 기준이니 그 기준을 지켜서 사용한다면 실수를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아, 물론 맞춤법도 최대한 지켜주면 이해하기 더 쉽겠지만 그건 뭐, 인터넷상에서 통용되는 맞춤법 파괴 정도로 타협을 하더라도 말이다.(고리타분하다거나 지루하다거나 재미없다거나 꼰대라거나 하는 소리는 또 듣기 싫으니까.)


카카오 톡으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끔 모든 문법을 파괴하는 해괴망측한 방식의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핵심을 강조하기 위해 어쩌다 문장의 구조를 뒤바꾸는 경우 말고, 그저 그게 습관이고 본인은 본인이 그렇다는 걸 모르는 사람 말이다.

조사나 연결되는 접속사 없이 단어의 나열만 늘어놓는다든지, 말허리를 뚝 잘라 키워드만 던진다든지, 주어, 서술어 호응도 되지 않는 말을 뒤죽박죽 섞거나, 한 문장의 길이가 너무 길고 그 안에 주어나 목적어가 여러 개 들어간다든지 하는 경우 말이다.


그래놓고는 모호한 것들에 대해 내가 다시 물으면 되려 나더러 이해하지 못한다고 답답해하며 만나서 이야기할 때는 참 잘 통하는데 왜 카톡은 이렇게 잘 안되지?라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고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지며 상대를 비난할 수도 없는 일이고 어차피 따지고 설명하는 게 의미도 없을 것 같아서 내가 취한 방식은 그저 숨을 가다듬고 참거나 중요하지 않은 문제는 이해하지 못한 채 넘기거나했다. 그저 카카오 톡이어서 생기는 오해이겠거니... 하며 말이다.

아, 물론 그런 문제점이 나에게도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말이다.

대신 그 이후로 그 사람과의 카카오 톡은 최대한 줄이고, 필요시 용건만 아주 간단히 전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긴 얘기, 깊은 얘기는 만나서 하자고 했다.

글로 하는 대화는 조금 건조해졌지만 필요 이상의 감정 소비가 사라져서 오히려 개운해졌다.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 톡이 시작된 지 13년이 넘었다. 그 시간 동안 그걸 사용하는 우리의 피로감 또한 차곡차곡 누적되고 있었다. 나만 안 쓸 수도 없는 일이고 앞으로도 그것 없이 살지는 못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더 나은 방법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 내지 않으면서 온화하게 소통하는 법을 깨우쳐야 한다.

내가 먼저 현명하게 바뀌어야 가벼워진다. 그래야 내가 다치지 않고, 내가 아프지 않으니 상대방을 아프게 할 이유도 없다.


글로 나누는 말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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