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제 살 것 같아."
아버지를 잃은 남자는 그 주 내내 위태로웠다.
많이 마시지 않았음에도 술을 이기지 못했고, 스스로의 몸을 제어하기 버거워했다.
그러면서도 나를 보며 웃었고, 그 웃음 뒤에 공허함이 묻어났다.
좀처럼 힘든 내색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남자라 제 의지와 상관없이 겉으로 드러나는 흔들림에 나는 당혹스럽기도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를 만나고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 남자, 지금 많이 힘들구나... 내가 그걸 잊으면 안 되겠구나.
다음 주까지는 술을 먹지 말라고 당부했다. 힘들어 보인다고.
하지만 그에게는 미룰 수 없는 약속들이 연달아있었다.
멀리까지 찾아와 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도 전해야 했다.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그는 밖에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마시고 싶으면 돌아와 나와 마시겠다고 말했다.
술이라도 있어야 버틸 수 있는 마음을 나는 너무 잘 안다.
술이라도 있어야 잊을 수 있는 마음을 나는 너무 잘 안다.
주말이 되어 함께 장을 보러 갔다.
며칠 동안 무얼 먹고살았는지도 모를 만큼 냉장고 속이 비어있었다.
나는 그에게 무어라도 좀 먹여야 할 것 같았고, 그는 과일이 먹고 싶다고 소박하게 말했다.
마트를 함께 돌면서 눈에 들어오는 식재료들을 그에게 권했다.
- 고기 먹을래요? 소불고기 할까? 아님 구워 먹을까? 뭐 먹고 싶어요?
- 나는 별로 생각 없는데, 애들이 좋아하겠네. 애들 해주죠.
- 장어 먹을래요? 장어. 이거 먹음 기운 좀 나지 않을까?
- 아니, 별로.
- 전복 어때요? 전복 먹음 힘 좀 나잖아. 맛있고.
- 아냐, 손질하기 번거로워.
- 낚지 요리할까? 낚지 좋아 보이는데.
- 글쎄... 딱히 생각이 없는데요.
식탐이 별로 없는 사람이 그나마 있던 식욕마저 모두 잃어버린 것일까.
마음에서 안쓰러움과 조바심이 일었다.
그가 좋아하는 토마토 두 팩과 방울토마토 한 상자, 그리고 탐스러운 자두를 카트에 담고 여름 과일로 놓칠 수 없는 커다랗고 싱싱한 수박 한 통까지 신중히 골라 실은 다음 채소 코너로 갔다.
부추를 좋아하는 그가 부추를 먹자고 한다.
잎이 가는 연한 부추를 골라 한 단 싣고 파프리카, 가지, 애호박, 버섯, 상추 등의 익숙한 채소들을 골라 담은 다음 제철 나물을 파는 코너로 가니 평소에 볼 수 없던 채소들이 보였다.
- 민들레 잎이 있네? 민들레 먹어 볼래요?
이건, 음식이 아니라 약이야, 약!
어릴 때 엄마가 많이 해주던 건데...
- 음...
그래요. 먹어봅시다.
어릴 때부터 골골거렸던 나는, 여기저기 부실한 데가 많아 자주 엄마가 민들레 요리를 해주시곤 했다.
잠 잘 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종종 민들레 잎을 한 소쿠리씩 이고 들어와 손끝이 까매지도록 밤새 그 잎들을 다듬던 엄마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것들은 때로는 나물이 되고 때로는 쌈채소가 되고 또 때로는 진한 즙이 되었다. 나는 그 정성도 모르고 그 마음도 모르고 단지 쓰고 맛없는 것을 먹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외면했었던 철없는 딸이었다.
이제 나를 위해 민들레 요리를 해줄 사람은 없지만, 민들레를 보면 언제나 엄마가 떠올랐다.
그리고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이 민들레를 보며 누군가를 걱정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혼자 피식- 실없는 웃음이 났다.
민들레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전부터 약재로 사용됐다. 민들레 잎은 식용으로 쓰이고 뿌리는 약용으로 사용된다. 민들레는 염증 및 피부질환 등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으며 간 기능을 좋게 한다. 유럽에서는 뿌리를 고혈압 치료하는데 이용했다. 그러나 손발이 차고 속이 냉한 사람은 민들레를 장기간 복용하면 위장에 부담을 줄 수 있다. 생약명은 포공영(蒲公英).
[네이버 지식백과] 민들레 [Korean dandelion] (식물학백과)
한방에서는 꽃피기 전의 식물체를 포공영(蒲公英)이라는 약재로 쓴다. 열로 인한 종창·유방염·인후염·맹장염·복막염·급성간염·황달에 효과가 있으며, 열로 인해 소변을 못 보는 증세에도 사용한다. 민간에서는 젖을 빨리 분비하게 하는 약재로도 사용한다. 한국·중국·일본에 분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민들레 [Dandelion]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어? 이런 게 있네?
이거 두릅이래. 이런 두릅도 있나?
- 그러게. 처음 보는데.
- 봄에 먹던 두릅이랑 다른 건가? 다르게 생겼죠?
평소에 두릅을 좋아하던 우리는 처음 보는 두릅의 모양이 신기했고, 마침 옆에서 나물들을 정리하고 계시던 직원분이 있어 여쭤보았다.
봄에 먹던 참두릅순이랑 맛은 비슷하고, 먹는 방법도 같다고 하셨다. 데쳐서 초고추장을 찍어 먹으면 된다고.
아울러 민들레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는데, 대부분 생으로 쌈채소로 먹거나 겉절이로 무쳐서 먹는다고 하셨다. 쓴 맛이 싫으면 살짝 데쳐서 양념에 무쳐도 된다고. 씁쓸한데 두 가지다 한 철이고 몸에 좋은 거니 드셔보시라고 권해주셨다.
가격도 무척 저렴하였다. 각각 한번 먹을 수 있을 만큼만 담아서 한 봉지에 2,500원 ~ 3,500원 사이였다.
두 말 않고 한 봉지씩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검색을 해보니 이것의 이름은 정확히 '여름 두릅'이었다. 우리가 흔히 먹는 것은 봄에 나는 두릅순이고. (참두릅, 땅두릅, 개두릅)
단백질이 많고 지방 · 당질 · 섬유질 · 인 · 칼슘 · 철분 · 비타민(B1 · B2 · C)과 사포닌 등이 들어 있어 혈당을 내리고 혈중지질을 낮추어 주므로 당뇨병 · 신장병 · 위장병에 좋다. 두릅은 단백질과 회분이 많고 비타민 C도 많으며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조성이 좋아 영양적으로도 우수하다. 뿌리줄기는 감기로 인해 전신이 쑤시고 아프면서 땀이 안나는 증상에 발한, 이뇨를 목적으로 많이 이용되었으나 생강보다는 못하다.
두릅에는 사포닌이 들어있어 혈당강하 및 혈중지질 저하 효과가 있다. 두릅을 먹으면 혈당치를 낮춰 당뇨병에 효과가 있다. 그러나 두릅은 냉한 식물이므로 많이 먹으면 설사나 배탈이 나기 쉽다. 민간에서는 두릅나무 가시를 달여 먹으면 고혈압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살짝 데친 후 초고추장에 찍어먹어야 비타민이 파괴되지 않는다.
◆ 두릅의 쓴 맛을 나게 하는 사포닌 성분은 혈액순환을 도와줘 피로회복에 좋다.
◆ 나무껍질은 당뇨병과 신장병의 약재로 쓰여왔고, 잎과 뿌리, 과실은 건위제로 이용된다.
◆ 두릅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말린 총목피는 당뇨병을 다스리고 위를 튼튼히 할 뿐만 아니라 신장병에도 좋다.
※ 영양성분 함량 : 수분 85.8%, 단백질 5.6g, 탄수화물 5.9g, 칼슘 50mg, 인 150mg, 철 5.2mg, 비타민 A 3240I.U, C 5mg.
[네이버 지식백과] 두릅 (농식품백과사전)
저녁상을 준비한다.
아이들이 먹을 소불고기를 재워서 센 불에 빠르게 볶고 상추도 씻어 접시에 담는다.
애호박을 얇게 (너무 얇지는 않게) 썰어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부친다. 소금만 살짝 뿌려주면 끝이다. 계란물을 입히지 않아도 열기에 반쯤 익은 애호박에서는 고급스러운 단맛이 난다.
여름 두릅은 씻어서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재빠르게 데쳐낸다. 오래 데치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오래 데치면 물컹해져 식감도 맛도 영양도 덜하다. 살짝 덜 익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얼른 건져내 차가운 물에 여러 번 헹구고 물기를 꼭 짜서 접시에 담는다. 초고추장과 함께.
민들레잎은 씻어서 물기를 탈탈 털어 둔다. 생것 그대로 쌈으로 먹을 요량이라 얹어 먹을 강된장을 함께 끓인다. 쌀뜨물에 손질한 멸치를 그대로 넣고 보글보글 끓이다 된장과 으깬 두부, 양파와 청양고추 그리고 우렁이와 버섯가루를 넣는다. 뻑뻑하고 되직해지면 강된장은 완성이다. 맛을 보니 감칠맛이 끝내준다. 밥 위에 생 부추 뚝뚝 분질러 넣고 강된장 얹어 슥슥 비벼 먹고 싶어지는 맛이다.
마지막으로 멸치, 다시마 육수에 순두부와 계란을 풀어를 넣고 새우젓으로 간을 한 순두부 계란탕을 만든다. 다 끓었을 때 팽이버섯 반 단과 파만 솔솔 뿌려주면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한 맛있는 탕이 완성된다.
상을 차리며 꼬들한 식감에 짜지 않은 줄기상추 장아찌를 함께 낸다.
여름 두릅을 초고추장에 콕 찍어 입 안에 넣으니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이 계절에 또 있을까 싶다.
이 맛 좋은 음식을 단 몇 천 원의 대가로 가져오다니. 너무 고마운 일 아닌가.
연이어 두릅 몇 점을 먹고 이제 민들레잎을 넓게 펴서 그 위에 따끈한 밥을 올렸다. 뚝배기 안에서 여전히 보글보글 거리는 강된장을 크게 한 숟갈 떠서 그 밥 위에 얹는다. 야무지게 감싸 입 안으로 넣는다.
두릅의 두세 배쯤 쌉쌀한 맛이 입 안을 감돈다. 씹을수록 강된장과 어울려서 그 쓴 맛은 오묘해진다.
맛있다.-
맛있네.-
히히히. 잘 샀다.
아이들은 소불고기를 밥 위에 얹어 자작한 국물과 함께 비벼서 먹고 있다.
내가 그 나이에 그랬듯 당연히 쓴 나물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 맛을 알리가 없지.
나와 같은 패턴으로 조용히 음식을 먹던 남자가 갑자기 크게 숨을 몰아 쉰다.
입 밖으로 크게-
하...
이제 좀 살 것 같다.
이런 걸 먹으니 좀 살겠네. 하...
고기를 먹어서는 도저히 회복이 안돼.
나, 이제 좀 살 것 같아.
민들레와 두릅을 먹던 남자는 그제야 좀 살 것 같다며 난생처음 자신의 힘들었음을 저도 모르게 표현했다.
나는 놀랐다. 사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놀랐다.
그가 그렇게 죽을 것처럼 힘들었음에도 놀랐고, 그렇게 속마음이 툭 튀어나온 것도 놀랐다.
그리고 그를 살게 하는 것이 고기도 아니요, 장어도 아니요, 전복도 아니고 낙지도 아님에 놀랐다.
그것은 고작 몇 천 원어치의 나물이었다.
그를 살린 음식, 민들레와 두릅.
어쩐지 코 끝이 찡해왔다.
연신 민들레를 펼쳐 강된장을 얹어 입으로 넣으며 그는 말했다.
이런 음식을 먹고살아야 해.
진짜 약이 맞구나...
맛있다.
두릅도 너무 맛있네.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맞는 음식이 있다.
그것은 체질에 맞는 실질적 음식일 수도 있고, 기억과 함께 내재되어 있는 정서적 음식일 수도 있다.
나에게 민들레는 정서적인 음식이라 그것을 먹으며 과거를 함께 먹지만
그에게 민들레나 두릅은 체질에 맞는 실질적 음식이며 또 지금부터 시작되는 기억이라 미래를 함께 먹게 될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대단한 사건일지 모르나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은 결코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다.
따듯한 관심, 따듯한 말, 따뜻한 눈빛, 따듯한 손길, 따듯한 포옹.
그리고 따듯한 밥.
아마, 그날 그는 그 모든 것을 온몸으로 다 받아먹지 않았을까?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니 건강하게 살아날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종종 따듯한 마음으로 그를 데워주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