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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IN Jul 07. 2023

세상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바나나

< 마우리치오 카텔란 Maurizio Cattelan >




- 젊은 예술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 인생이란,
 당신이 직접 저질러야만 하는 실수를
모두 그러모은 것이다.






세상에서 앤디워홀의 그것 다음으로 유명하신 바나나를 만나러 갔다.

두 달 동안 수시로 예약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어렵게 예약한 전시다.

하... 이렇게 예약이 어려워서야.


매번 전시는 기대하고 가면 실망했고, 기대 없이 가면 놀라웠기에 이번에도 큰 기대는 접어두었다.

결론적으로는 좋았다. 역시 기대는 접어 두고 보는 것이 진리!


전시회를 다녀오고 나면 언제나 느끼는 사실이지만 활자나 미디어를 통해 익히고 공부하는 예술과 그저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는 예술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직접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무언가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미묘한 마음의 변화가 내 삶을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은 분명하니까.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전시는 특별한 한 두 작품에서 커다란 사유를 했다기보다 전반적으로 잽을 맞은 것 같은 잔잔한 펀치로 느껴진 전시였다. 그래서 소소하게 기록을 해보고자 하는데, 나는 예술을 사랑할 뿐, 미술에 전문 지식은 전혀 없는 문외한이니 전시 리뷰를 하려거나 어설픈 코멘트를 달려는 것은 아니고 그저 작품을 보면서 느꼈던 그날의 느낌들 또 그 이후에 가졌던 나의 생각들을 조금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미 여러 블로그를 통해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으니 모든 작품을 소개하거나 기록하지는 않고 다만, 나에게 조금이라도 영감을 주고 인상적이었던 작품만 박제해 본다.



< 동훈과 준호 Donghoon and Junho_2023 / 나무, 스티로폼, 스테인리스 스틸, 옷, 신발, 소품 >



블로그로 익히 봐서 전혀 놀라지 않았던, 

미술관 입구의 노숙자 아저씨와 미술관 로비의 역시 노숙자 아저씨.

놀라진 않았지만 그 사실성이 상당하긴 했다.

길에다 내놓으면 당장이라도 누군가 그를 흔들어 깨울 것 같은 모양새.


"아저씨... 일어나세요. 여기서 주무시면 큰일 나요."



< 아버지(Father)_2021 / 벽에 아크릴릭 >



전시된 모든 작품을 통틀어 가장 감명 깊었던 작품이다.

확실히 리얼리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런 신파 드라마 같은 예술을 거부할 수가 없다.

전형적이고 고전적이기까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감동스러우면 된 거지.



< 무제(Untitled) / 2008 >



창을 향하고 있는 것인지, 벽을 향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길을 향하고 있는 것인지.

소망인지, 절망인지, 절규인지.

어쩐지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낡은 신발 한 켤레, 그의 쓸쓸함이 느껴진다.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지만 차마 위로할 수 없는 그런 처연함이 밀려온다.

그저 말없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 그(Him)_2001 / 플래티넘 실리콘, 유리섬유, 머리카락, 옷, 신발 >



이름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바로 '그'이다.

내가 아무리 걸음을 옮겨도 자꾸만 이 아저씨가 나를 째려보아서 심히 기분이 나빴더랬다.


'아니, 꿇어앉아 두 손을 모았으면 눈에 힘 좀 빼면 안 돼? 성깔머리 하고는. 쳇! '


이 작품을 통해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예술가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대답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하는 사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

질문을 잊지 않고, 또 잃지 않는 사람. 그것이 예술이고 예술가여야 한다.


이 작품은 발표된 이후에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그럴 일인가?





히틀러를 사실적으로 '축소'한 2001년작(作) '그'(Him)는 카텔란이 스웨덴의 한 미술관에서 전시 의뢰를 받은 후 제작한 작품이다. 카텔란은 왜 히틀러를 조각하기로 했을까. 

김성원 부관장은 "스웨덴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 나라였는데, 중립국이면서도 뒤에서는 나치를 굉장히 도왔다고 한다"며 "그래서 스웨덴에서는 나치에 대한 생각이 굉장히 복잡하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 상황에서 스웨덴에서 전시를 하게 됐고, 히틀러를 이곳에서 전시하게 된다면 독일이나 유럽 다른 나라에서 기대하기 힘든 굉장히 복합적이고 다양한 반응이 나올 것이라 예상하고 작품을 제작했다"라고 설명했다.


< 출처 : www.news1.kr >





Q.

왜 그렇게 선 넘는 걸 좋아해요?

당신은 사람들을 도발하는 것을 좋아하나요? 미술계 사람들도? 그렇다면 왜 그런가요?


A.

나는 틀을 깨는 것을 좋아하고, 여기엔 권위에 대한 반골 기질을 지닌 내 성향이 작용한다고 본다. 

나는 모든 형태의 정해진 권력에 대한 반감이 있으며, 할 수 있는 한 그것에 언제나 저항하려고 한다.

도발은 전쟁도 시작할 수 있다.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그랬고, 아프간 전쟁을 촉발한 9·11 테러가 그랬다. 나는 예술이 이렇게 역사를 바꿀만한 파워를 가지길 바란다.


과거에 예술은 그런 힘이 있었다. 카라바조의 작품은 신성에 대해 보는 관점을 바꾸었다.

나는 예술 작품이 불편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저 보기 좋은 디자인 제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언제나 권위와 맞서는 과정에 있으며, 아픈 곳을 긁어주는 손톱이다.


< 출처 : www.donga.com >



< 보이드(Void)_2019 / 레진, 스티로폼, 에폭시 바니시 >



작품명과는 역설적인 작품.

Void는 빈 공간인데, 어째 작품은 작가의 작업물들로 가득 찼다.

공허함을 피력한 것일까?

그 마음을 모르지 않을 것 같아 고개가 끄덕여진다.



< 무제(Untitled) / 1999 >



어쩐지 쾌걸, 조로도 생각나고 말이지.

나는 이런 여백이 많은 작품이 좋더라.

내 안에 내가 너무 꽉꽉 들어찬 인간이라 그런가. 여유가 있고 여백이 있는 것이 편안해.

내 사고를 더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말이지.


이것도 일종의 '작가의 질문'이겠지?



< 어머니(Mother) / 1999 >



역시 전형적이고 고전적이며 신파적이지만

뭉클해.


그리고 궁금해.


무엇을 향한 기도인지,

누구를 향한 두 손인지.



< 숨(Breath)_2021 >



아...

왜 나 눈물이 날 것 같지?

잘 모르는 감정인데, 그냥 알 것도 같은.

반드시 경험을 통해야만 공감을 하는 건 아닌가 봐.

그저 알게 되는 마음도 있나 봐.


제목마저 '숨'이라잖아...



< 무제(Untitled)_1999 >



어머나... 아저씨...

예술가랑 친한 건 역시나 힘든 일이군요.


전시된 작품들 중 가장 유쾌했고(미안하지만),

역시나 예술가답다 여겨졌던 작품. 작업? 작업물? 암튼.


일회성으로 끝나지 못하고 사진으로 박제되어 세계의 미술관을 유랑하는 신세라니.

너무 안쓰러운데 너무 즐거워. ^^

미안해요 아저씨. ^^;





1999년에 발표한 그 ‘무제’ 작품은 반 농담으로 카텔란의 ‘갤러리스트 학대 3부작’ 중 하나로 불린다.

마시모 드 카를로라는 아트 딜러는 갤러리의 하얀 벽에 다른 무엇도 아닌 그를 매달아 전시하겠다는 카텔란의 발상을 받아들였다. 사업을 위해서는 작가의 뜻을 따라야 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작가와 작품을 좌지우지하는 갤러리스트가 주도권을 잃은 채 다소 기괴한 방식으로 전시된 모습.

벽에 매달린 남자는 지친 나머지 전시 오프닝이 끝나기도 전에 병원으로 실려갔고, 그날의 퍼포먼스는 사진 기록으로 남아 지금껏 이렇게 미술관을 유랑한다.

갤러리스트가 고행을 겪는 것으로 전시를 시작한 그 퍼포먼스에 맨 처음 붙은 제목은 ‘완벽한 하루’였다.


카텔란은 작가와 전시를 움직이는 존재인 '보이지 않는 손'을 이런 식으로 관객 앞에 노출시켰다.


< 출처 : www.wkorea.com >



< 무제(Untitled)_2007 >



스릴러 공포 영화 한 편을 보고 있는 듯한.

매트리스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 프레임까지 그대로 뜯어 와 작품화한 것을 보면

카텔란 그는 역시 극사실주의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평소에 늘 궁금하던 것이 '왜 미술작품에는 유독 무제(Untitled)라는 작품명이 많을까?'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이다.

이번 카텔란 작품에서도 유독 '무제(Untitled)'라는 작품명이 많았는데,

그 해답을 한 인터뷰 기사에서 찾았다.





Q.

작품명에 유독 ‘무제(Untitled)’가 많은 이유는 뭔가요?

비슷한 작업을 조금씩 변형해 선보일 때마다 제목을 바꿔 붙이기도 하시죠. 리움미술관 로비에 설치된 비둘기 작업의 제목은 ‘유령(Ghosts)’인데, 다른 때는 비둘기들이 ‘관광객(Tourists)’, ‘어린이(Kids)’라는 제목으로 나타나는 식으로요.

공간이나 당신의 심상에 따라 새롭게 반영되나요?


A.

‘무제’라는 제목을 보면 내가 나 스스로한테 욕을 하는 기분이 들어요. 끝내지 못한 숙제 같달까. 하지만 ‘무제’보다 더 나은 제목을 못 찾겠으니 어쩔 수가 없어요. 

내 작업의 대부분을 부숴버릴 수 있다면 새롭게 편집하고, 남는 게 별로 없을 때까지 매일, 점점 더 가혹하게 몰아붙일 겁니다. 

제목 없는 작품은 정말 싫지만 나쁜 제목은 더 싫어요. 그리고 전시에 따라 제목이 바뀌는 건 질문에서 짚은 대로예요. 전시 공간이 종종 제목의 의미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거든요.


< 출처 : www.wkorea.com >



< 아홉 번째 시간(La Nona Ora)_1999 / 실리콘 고무, 머리카락, 옷, 십자고상, 액세서리, 돌, 카펫 >





‘아홉 번째 시간’(1999)은 특정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공고한 권력을 향한 카텔란의 태도를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이다.


운석에 맞아 쓰러진 교황을 보여주는 ‘아홉 번째 시간(La Nona Ora)’이나

공손히 무릎 꿇은 채 회개 중인 히틀러의 얼굴을 한 ‘그(Him)’는 큰 논란을 부른 작품이다. 

‘내겐 규칙 따위를 존중할 능력이 없다’는 그의 고백처럼, 카텔란은 모든 종류의 권위와 체계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딱히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거나 선동하기 위한 의도란 없다고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다만 그가 제시하는 생생한 묘사를 통해 공고한 권력과 우상 숭배를 파괴하려는, 혹은 역사의 유령처럼 도처에 존재하는 21세기 버전 히틀러들을 상기시키려는 태도를 느낄 수 있다.


< 출처 : www.wkorea.com >





1999년 작품을 제작할 당시 교황은 요한 바오르 2세(재위 1978~2005)다. 이 요한 바오르 2세가 운석에 맞아 쓰러져 있는 모습인데, 당초에는 서 있는 조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작품에 힘이 없다고 느낀 카텔란이 운석을 구해다가 작품에 떨어뜨렸고 그대로 쓰러지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


1999년 스위스의 쿤스트할레 바젤에서 처음 선보였는데, 카텔란은 스위스가 스웨덴처럼 중립국이지만 유럽의 안전을 위해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 점을 비판하는 의도로 작품을 제작했다고 한다. 

특히, 그 표현을 바티칸 시국의 원수이자 교황을 넘어뜨리는 모습으로 표현해 모든 권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톨릭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에서의 작품에 대한 반응이 다른 점도 카텔란의 의도였을지 모른다.


< 출처 : www.news1.kr >



< 코미디언(Comedian)_2019 / 생 바나나, 덕테이프 >




실제 코미디언은 배우도 아니고 일반인도 아닌,
허구와 현실 사이의 림보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코미디언(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개념미술과 농담 사이에 있으며,
개념미술엔 감정이 없고
농담은 통상 큰 생각을 전달하지 않는다.


< 마우리치오 카텔란 >





드디어 만난 유명한 바나나님.

제목이 '코미디언'이라는 것이 코미디이지 않은가.


이 바나나에 관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생 바나나'와 '테이프'가 작품인 이것은 설치하는 정확한 매뉴얼이 있다든지, 하루나 이틀 간격으로 신선한 바나나로 교체된다든지, 작품이 12만 달러에 팔렸다든지, 정품 인증서를 넘겨주는 식으로 작품을 거래한다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바나나가 어느 전시회에서 관람객(행위 예술가)에게 뜯어 먹혀버린 일화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결국, 이 작품은 누군가에게 먹혀도 그 자체로 예술일 수 있다는 관대함 혹은 호기로움이 공존하는데  그 부분에서 나는 낙찰되자마자 분쇄기로 그림을 갈아버린 '뱅크시'의 '풍선과 소녀 (Girl with the Balloon)'와 비슷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다만 뱅크시의 퍼포먼스는 자본 미술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면 카텔란의 '배고픈 관객이 먹어버린 바나나'는 예술은 그저 일상에 공존하는 행위 그 자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일종의 관조 같은 느낌이었다.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런데 만약, 나라면...

먹어 없어진 바나나나 시들어 가는 바나나를 매일 싱싱한 새것으로 교체하는 대신,

알맹이 없는 껍질이나 까맣게 늙어가는 바나나 그 자체를 계속 전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 자체가 삶이고 인생이니 그게 뭐, 어떤가.

누구나 껍질을 벗겨 보면 별 게 없고, 누구나 시들시들 곪고 늙어가는데 말이다.


또 카텔란의 작업은 '뒤샹'의 변기나 '앤디 워홀'의 바나나, '로버트 인디애나'의 팝아트 조각처럼 기존의 것을 교묘히 차용하는 식이 많은데, 그에 대해 카텔란은 이렇게 말했다.



모방은 인간 문명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개념입니다.
모방이란 지식이 존재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 때문에.







- 당신이 생각하는 위대한 코미디언은 누구입니까?

- 코미디언이 되려고 의도하지 않은 코미디언.



코미디언이 될 생각이 없는 코미디언이라니!

예술가가 될 생각이 없는 예술가.

어른이 될 생각이 없는 어른.


그것은 혹시 
카텔란 그 자신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가 '괴짜 예술가'라는 프레임에 갇히지 말고 의무감도 느끼지 말고,

그저 자유롭게 사고하고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길 바란다.

그리고 끝없이 질문해 주길.


질문하는 자가 없으면 삶은 종종 길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이고, 그렇기 때문에 작품은 관객과 대화할 때만 성공적이라고 여기는 그는 이제 디지털을 통한 바이럴이 일상화된 시대의 덕을 보고 있기도 하다. 

2018년 구찌의 후원 아래 상해 유즈 뮤지엄에서 열린 전시 <The Artist Is Present>를 앞두고 그와 인터뷰했을 때, 카텔란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술가가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그 작품은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옛날 사람이다.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냥 지켜본다.

하나의 명료한 개념으로 추려낼 수 있는 대상은 예술적으로 죽은 목숨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예술에는 단도직입적이고 유일무이한 의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도가 있다면 이미 해결된 문제이고, 흥미로운 구석이 없다. 만약 전시에 단 하나의 목적이 있다고 하는 경우, 그건 단순한 광고일 것이다.



< 출처 : www.wkorea.com >





예술을 이해할 때 예술가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도움이 된다.

그의 인터뷰에는 많은 통찰이 있다. 여러 군데 줄을 그으며 여러 번 읽었다.

읽다 보니 평소 나의 생각과 비슷한 점도 많고 해서 신기하기도 했고 그래서 더 관심이 생긴 작가.

긴 내용이지만 이 남자의 예술 세계가 궁금하다면, 이 남자의 철학이 궁금하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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