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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IN May 19. 2023

큰 빵 vs 작은 빵



한 아이가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조그만 시골 학교의 반장과 회장을 도맡아 했다.

그리고 학교 외부에서 열리는 각종 수학 경시대회, 과학 경시대회, 미술 대회 등에 참가했다.

아이가 특별히 원했거나, 아이의 부모가 원했던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 그런 일들은 친구들의 지지로 시작되었고 또 학교 선생님들의 추천이나 권유로 성사되었다.

학교에서는 아이에게 아예 과학실 열쇠를 맡겼고, 언제든 들어가서 실험하고 연구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그 어린아이는 남쪽 끝 바닷가에서 멀고 먼 서울까지 경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올라오기도 했는데

그때, 서울 역 앞 허름한 여관에서 아빠와 함께 잠을 잤다고 나중에 얘기해 주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자 아이는 더 이상 반장도 회장도 하기 싫었다.

물론 각종 대회에 참가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아이에게 말했다.




너는 우리 초등학교의 대표야.

그러니 네가 나가서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주어야 해.




인근의 초등학교들에서 모인 나름의 대표들은 모두 자신감에 차 있었다.

졸지에 시골 초등학교의 대표가 된 아이는 그 대표들의 무리에 마지못해 들어갔고

또다시 반장이 되었고 회장이 되었다.

어릴 때의 사고로 몸이 약했던 아이는 자신이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릴 수 있는 방법이 공부뿐이라 여겨 열심히 공부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언제나 깜깜한 밤이었고, 주말에도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갔다.

여유 시간에는 놀 것도, 할 것도 딱히 없어 책을 읽고 그림을 그렸다.


고등학교는 더 좋은 곳으로 가게 되었다.

주변 도시의 중학교 대표들이 모이는 학교였다.

집을 나와 학교가 있는 도시에서 형제들과 자취를 했다.

새벽에 학교를 가고 밤에 돌아오는 날들이었으며 그 와중에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해야 했다.


이번에는 진짜 반장도 회장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각종 대회도 참가하고 싶지 않았고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 하지 않았다.

그 학교에는 이미 많은 중학교 대표들이 있었고

아이를 초등학교 대표로, 중학교 대표로 알고 있는 친구들도 없었으므로

아이가 반장이나 회장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도 닦달하거나 따지지 않았다.




- 그래서 어땠어? 안 했더니?


- 좋았어. 편했고. 조용하고.





< pixabay.com >



그렇게 아이는 대학생이 되었고

이제 더 이상 반장을 하거나 회장을 하거나 각종 경시대회에 참가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반년이 지나고 아이는 여행을 가게 되었다.

대학 기숙사 룸메이트인 남자 친구와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인 여자 친구와 셋이서 지리산에 가기로 한 것이었다.

아이와 남자 친구는 서울에서 출발하고 여자 친구는 부산에서 출발하였는데

그날 친구 둘은 서로를 처음 보는 사이였다고 한다.


밤이 깊고 술을 한 잔 하던 청춘들은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이야기 중에는 각자의 학창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때 아이가 말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큰 빵이 먹기 싫었어.

나는 작은 빵이 좋았거든?


그래서 작은 빵을 집으려고 하면

사람들이 자꾸만 큰 빵을 먹으래.


나는 그걸 다 먹지도 못하겠고

먹어봤자 남길 것이 분명한데

왜 자꾸 큰 빵을 먹으라는 지 모르겠어.




그러자 유심히 듣고 있던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인 여자 아이가 말했다.




야, 그거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냐?

사람들이 너에게 큰 빵을 주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그걸 네가 다 무시하고 작은 빵을 먹겠다고 우기는 건

결국 너 하나만 생각하는 거야.




아이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작은 빵을 먹겠다는 것이 이기적인 생각일 수 있구나...


그리고 부끄러워졌다고 한다.

타인의 관심과 기대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 어떤 느낌이었는데?


- 벼락을 맞은 것 같았어. 머릿속의 벼락.


- 벼락?


- 나보다 성숙하다는 느낌.

  그 성숙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

  타인의 이기심도 존중해 볼 가치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

  뭔가 옳은 걸 발견한 건 아니고,

  다만 내가 옳은 건 아니구나를 발견한 것 같았어.




아이는 밤새 잠들지 못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친구 둘은 밤새 잠들지 못하고 '술'을 마셨다고 한다.


아이는.

그제야.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한다.



< www.pexels.com >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에 나는 어른이 된 아이에게서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그때 나는 그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이해하는 척했을 뿐.


그게 왜 이기적인 거지?

작은 빵 먹고 싶다는 데 먹음 되지.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으라고 하는 게 더 폭력 아니야?

아니 그리고 빵은 뭐야. 큰 빵? 작은 빵?

아무튼 뭐 그렇다니까.


그 후로도 3, 4년에 한 번쯤, 나는 그 빵에 대해서 물어본다.

이상하게 궁금했고, 이상하게 이해해 보고 싶었다.




그때 그 빵 이야기 있잖아? 큰 빵, 작은 빵.

그거 다시 한번 얘기해 줄래?

아직 잘 이해가 안 돼서 말이지.




정말 신기한 건, 19년 전보다는 10년 전이

10년 전보다는 지금이 그 말을 훨씬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가 말한 빵도 알겠고, 여자 친구가 말한 이기심도 알겠다.

다만, 아직 다 납득은 되지 않았다.


얼마 전에 나는 어른이 된 아이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그때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내용 정립은 아직도 안 돼.

옳은 이야기도 아니고 말이지.

다만 번개를 맞은 거지. 금강.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자아도 결국 타자로서 존재가 성립되는 것.

그런 걸 여렴풋이 느낀 거지.





< pxhere.com >



나는 지금 무슨 빵을 먹고 있을까?

내가 작은 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결국 내 안에서는 큰 빵이었던 거 아닐까?

그럼 그걸 작은 빵이라고 얘기할 수 있나?


누구나 먹어야 하는 빵이 있는데,

그 빵을 먹어야 사는데,

누군가는 조금 더 큰 빵을 먹어야 하고

또 누군가는 조금 작은 빵으로도 살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빵을 먹어야 하며,

지금 그걸 잘 먹고 있는 걸까?

.

.

.


후에 들은 얘기로, 여행 후 돌아와서 함께 여행을 갔던 기숙사 룸메이트 놈은

아이의 지갑 속 돈을 훔쳐 부산행 기차표를 샀다고 한다.

그 기차표를 가지고 함께 여행을 갔던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며

아이에게 이기적인 놈이라고 말했던 여자 아이를 만나러 부산으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둘은 연인이 되었으며 훔쳐 간 돈은 끝끝내 돌려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날 밤 지리산에서 '아이는 어른'이 되고

그날 밤 지리산에서 '두 친구는 연인'이 되었었나 보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결혼은 했어?


- 둘이? 깨졌지.

  각자 딴 사람하고 결혼해서 잘 살아.




그래, 한 때나마 뜨거운 연인이었으면 된 거지 뭐.

영혼한 사랑이 얼마나 있겠나.


에구에구...

나는 내 빵이나 잘 챙겨 먹어야겠다.

이왕이면 빵 값도 좀 벌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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