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가의 서랍'에는 '작별 인사'라는 글이 저장되어 있다. 내가 '작별'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작별'에 관한 이야기이다. 두 달 전쯤 작성했지만 업로드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업로드하지는 않을 글이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작별 인사 2'라는 글을 새로이 남기는 것은 요즘 내 생활 곳곳에서 드러나는 그 '작별'의 흔적과 무게 때문이다.
그 무게를 좀 덜고 싶다. 이렇게라도 해서 가벼워질 수만 있다면 좀 덜어내고 싶다.
작별 作別
명사 / 인사를 나누고 헤어짐. 또는 그 인사.
사실, '작별'이라는 말은 인사라는 뜻을 포함한다.
그럼에도 굳이 제목에 '인사'를 붙인 이유는 '이별'과 '이별의 의식'에 관한 '작별'을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정중한 만남의 인사를 나누듯, 관계를 맺고 있던 이와의 이별에서 건네는 예의 바르고 단정한 이별의 말. 혹은 이별의 의식. 그런 것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작별이 없는 이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마주한 이별. 미처 준비할 틈도 없던 시간과 감정.
오롯이 혼자 버려진 그 이별의 현장.
시작은 같이 했는데 끝은 혼자 해버린 그 잔인한 관계.
그것은 참... 감내하기 어려운 유기의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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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처음으로 서로를 같은 무게로 사랑했던 이는 함께한 지 2년이 지나가던 어느 날에 바람같이, 정말이지 바람같이 사라졌다. 누군가가 나를 찾아온 그날에 말이다.
나를 찾아왔던 이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했다. 자신 또한 그 거짓에 속고 있었다고.
그의 나이며 이름이며 학력이며 직업이며 부모며 집이며 고향이며... 내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이 가짜라고 했다. 그 남자가 찾아온 저녁 7시쯤, 2년 넘게 서로를 아끼고 뜨겁게 사랑했던 아니, 그랬다고 여겼던 그는 도망치듯 뛰쳐나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도 그 이후로도 그는 전화 한 통, 문자 한 통이 없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아는 그의 주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걸. 그의 입으로 들은 말 외에 어느 것도 내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 없다는 걸. 그의 신분증조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걸.
그런 걸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나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그의 나이를 알지 못한다. 어떤 설명이나 변명도 듣지 못했고, 사과나 해명이나 이별의 말도 없었다.
나는 폐부를 찔린 듯 아주 오래 아팠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같은 나이의 아이를 기르며 가까워진 세명의 친구가 있었다. 다들 나보다 언니였지만 우리는 친구였고 많은 시간을 함께했고 많은 생각을 나누었다. 그중 유난히 여리고 유난히 고되고 유난히 솔직한 언니가 있었는데 사는 곳도 가깝고 즐기는 것도 비슷하여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넷이서 함께 술을 기울이던 어느 밤, 너무 오른 흥을 깨드릴 수 없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라 고민을 하다 조용히 혼자서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같이 있던 다른 친구에게 먼저 간다는, 걱정 말라는, 메시지를 남겨 놓고서 말이다.
그다음 날, 나는 그들에게서 버려졌다. 아니 정확히는 유독 가까웠던 그 언니에게서 버려진 것이었다. 하지만 모호한 감정들이 오가는 그 무리에서 결국은 내가 그들 모두를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함께한 시간이 6년이 넘었었다. 버려지는 데는 단 하룻밤이었다.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다. 정확한 이유도 알지 못한다. 다만 많이 서운했구나. 어쩜 하룻밤만의 서운함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라고 유추할 뿐이다.
차라리 나에게 화를 내주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충분히 설명하고 사과하고 이해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혼자만의 생각으로 모든 연락 체계를 끊어버린 그녀에게 나는 더 이상 손을 내밀 수 없었다.
내가 브런치를 떠나 있던 그 몇 년간의 시간은 나에게 참으로 절망이 가득한 시기였다. 그렇다고 다른 시기의 삶이 평안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에는 새로운 종류의 통증들이 동시에 나를 찾아왔기에 정말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장 절절했던 것은 바로 '죽음', 그것도 작별이 없는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2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나는 4명의 가족을 떠나보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처음으로 겪어 보았다. 그들과 유난히 살가운 것은 아니었지만, 예상에 없던 죽음들은 나를 동시에 죽일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오래도록 투병해 오던 첫 번째 죽음이 있었다. 마지막 짐을 가방에 챙겨 제 발로 걸어 들어간 병원에서 스스로 받아들인 죽음이었다.
그 죽음 이후 18일 만에 두 번째 죽음이 찾아왔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소식을 들은 나는 길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통곡하고 말았다. 진눈깨비가 쓸쓸하게 흩날리던 아주 추운 날이었다. 눈과 비와 눈물과 아우성이 뒤섞인 오후였다.
그 이후의 일들을 어찌 다 말로 전할 수 있을까. 차가운 장례식장에서 아무리 소주를 마시고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릴 수도 정신을 잃을 수도 없었다. 차라리 잃고만 싶었지만 소주는 물처럼 흐리기만 했다.
2년이 채 되지 않아 세 번째 죽음이 왔다. 죽음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마음속에 깊고 넓은 구멍을 내었고 그 구멍은 정도를 매기기 불가할 만큼 어두웠다. 아무리 그 구멍 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들여다 보아도 깊이도 넓이도 어둠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점점 더 강하게 나를 잠식해 갔다.
장례식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온 날 새벽, 전화를 받았다. 네 번째 죽음이었다.
세 번째 죽음에서 정확히 3일 뒤, 그러니까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이었다.
너무나도 잔인한 것이었다. 하...
나는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준비할 수 없었다.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너무 젊었기에, 너무 사랑했기에, 너무 미안했기에, 너무 그리웠기에, 너무 안타까웠기에... 너무...
너무 많이 아팠다.
그리고 며칠 전, 나는 다섯 번째 죽음을 맞게 되었다.
죽음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다가오고 준비되지 않는 마음에 상처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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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이별은 아프지만 지금의 내 모든 이별은 젊은 날의 이별과는 그 결이 조금 다르다.
치열하게 사랑하고 치열하게 이별하고 치열하게 슬퍼하고 다시 기운 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계속되는 일상을 살아갔던 그날들과는 다르다.
지금의 이별은 치열하지는 않지만 오래고 깊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들은 내내 뭉근하게 아프다가 쓰리다가 마침내 시리다. 흔적들은 일상에서 수시로 튀어나와 나를 흩트려 놓는다. 실실거리며 tv를 보다가도, 빠득빠득 설거지를 하다가도, 햇살 좋은 날 길을 걷다가도, 버스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보다가도, 놀이터에서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을 듣다가도 그냥 후드득하고 눈물이 발등으로 떨어진다. 고여있는 게 많다고, 덜어내라고, 무겁다고 자꾸만 물을 밖으로 털어내지만 마음은 차마 털어내지 못하고 안으로 안으로 뭉치고 뭉쳐져 더 거대한 덩어리가 되고야 만다.
그 모든 인사 없는 이별에 무방비로 당했던 나는 매번 약자가 되었다.
쌓아온 경험이 많으니 조금 더 유연한 작별 방법을 알 법도 한데, 그동안 모아 둔 숱한 작별과 이별들이 차곡차곡 모여서인지 지금의 이별은 낱낱의 것보다 두 배 정도의 무게로 나를 짓누른다.
앞으로도 나에게 얼마나 더 많은 이별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어차피 우리는 매일 이별하며 사는 삶이니 그 모든 이별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이별에 앞 서 '작별'이 있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