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자꾸 생각나는 문장이 있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많은 상처와 배신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이 말을 곱씹게 된다. 사람과의 인연을 쉽게 놓지 말자고, 결국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이란 믿음이 내 안에 있다. 그래서 지금도 가능한 한 사람을 이해하려고 한다. 질문하고, 대화하고, 그 사람의 세계를 알아가려 애쓴다.
물론 그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서 내가 손해를 볼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함께 살아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관계는 손익으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고, 때론 한쪽이 더 애써야 유지되는 순간도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 불균형도 감수하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확실히 알게 된 게 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어도, 아무리 이상에 가까운 사람이라 해도, 결국 그 관계를 받아들일지 말지는 내 마음이 먼저 결정한다는 것. 머리로는 괜찮다고 판단해도, 마음속 어딘가가 불편하면 그 인연은 깊어질 수 없다. 사람의 본질을 알아보는 건 결국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걸 부정하기 어렵다.
요즘 들어 더 또렷하게 느끼는 건, 사람들 사이에서 예의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말은 분명 이상적이지만, 현실에선 그 존중이 일방적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모두를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그 '모두' 속에는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존중은 상호적인 약속일 때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양성’이라는 단어도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지금 그 말에는 원래의 의미와 달리, 예의와 매너를 무너뜨리는 무질서까지 포함되어버린 것 같다.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 무례함까지 포용하자는 분위기로 바뀌는 게 아쉽다. 예의와 태도는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질서다. 그 기준이 무너지면, 다양성은 존엄이 아니라 혼란이 된다. 그런 다양성이라면, 나는 지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 권리는 나 역시 갖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사람을 믿고 사람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 함께 사는 세상에서 기쁨도 슬픔도 나누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실망이나 배신보다 더 큰 무언가를 함께할 수 있다고 믿기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고 더 좋은 것을 나누며 살아가려 한다. 내가 문화예술을 선택한 이유도 어쩌면 그 안에 있는 것 같다. 오늘도, 상처를 지우며 다시 사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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