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오후 3시 30분경, 빈의 6월의 햇살은 눈부시다. (2019년)
본 글은 600년간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왕가(Habsburg) 미술 컬렉션의 총본산인 '빈 미술사 박물관(Kunst historisches Museum)에 대한 Special Report이다.
본 편은 Part 1로 안토니오 카노바의 조각상을 시작으로 주세페 아르침볼도, 알브레히트 뒤러, 피터 브뤼헐, 폴 루벤스, 요하네스 베르메르 등 최고의 회화들을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코로나 시국에 굳이 현장에 가지 않아도 예술작품을 보실 수 있답니다. For Free!)
쌍둥이 건물 사이에 좌정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여제.
그녀는 누구인가.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였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보헤미아, 만토바, 밀라노, 갈리치아, 오스트리아 령 네덜란드의 통치자였다. 결혼 후 신성 로마 황후의 지위까지 얻었던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갖추었다고 평가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프란츠 슈테판과의 결혼은 프랑스와의 이해관계에 의한 정치적 결합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카를 6세가 서거하자 혈연관계에 있던 나라들이 그녀의 합스부르크 영토에 대한 상속권에 반기를 들고 오스트리아로 쳐들어가는데 이것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이다. (왕위 인정에 대한 대가로 슐레지엔 지방을 프로이센에 제공하게 됨.)
1756년에는 프로이센과의 '7년 전쟁'에서 패해 슐레지엔 탈환에 실패하였다.
프란츠 슈테판과 혼인해 16명의 자녀를 거느렸고, 이 가운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요제프 2세와 레오폴트 2세를 비롯해,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 등이 있다.
- Wikipedia 인용
카를 6세가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둘러싸고 누가 왕위 계승자인지 적자를 가리기 위한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는 23살이었다. 더구나 4번째 자녀를 임신 중이었다.
평온했던 왕가의 삶은 꿈처럼 끝나고 왕가를 지켜내야만하는 처절한 현실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남편이었던 프란츠 1세는 정치적인 영향력이 없어 그녀가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당주 역할을 해야했다.
당시 국제 관계 정세를 고려해 자녀들 대부분은 프랑스, 에스파냐, 이탈리아 등과 정략결혼을 맺게 하여 유럽 강대국 사이에서 합스부르크 가의 번영을 꾀하고자 했다.
그녀 입장에서 참 고된 삶이었으리라. 자녀들을 정략결혼의 대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긴 하지만 그로 인해 왕가를 유지할 수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16세기에 오스트리아, 독일을 비롯해 네덜란드, 스페인, 체코와 헝가리까지 600년에 걸쳐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죽음 이후 왕가의 주국인 오스트리아가 점차 해체 수순을 밟게 되고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한편, 그녀는 아이들의 교육과 계몽에 관심이 많아 지금도 오스트리아 국민에게 이상적인 어머니 상으로 남아있다.
빈 미술사 박물관 (Kunsthistorisches Museum)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 치하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와 대공들이 수 세기에 걸쳐 수집한 소장품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고트프리트 젬퍼의 설계로 1891년 개관하였다.
이 놀라운 예술 보물들은 이 박물관을 세계 최고의 박물관 중 하나로 만든다.
빈 링 스트라세(Ringstrasse)에 위치한 이 웅장한 건물을 찾는 관람객에게 압도적인 예술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젊은 시절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도 2층 큰 계단에서 일련의 천장화를 그렸다.
가장 멋진 홀은 의심할 여지없이 Cupola hall로 가장 귀한 재료,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 Stucco 작업(벽과 천장, 외벽의 장식)을 그 특징을 한다. - 빈 미술사 박물관 리플릿 인용
자 지금부터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5,000년 예술과 역사를 돌아보는 랜선 여행 출발합니다.
필자가 이곳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바로 그 작품이 대리석 계단 너머 홀에 보인다. 두근두근.
박물관의 entrance hall 은 자연사 박물관의 그것보다 더한층 화려하다.
숨죽여 흰 대리석 계단을 오른다. 흥분한 가슴을 부여잡으며.
계단을 다 오르면 그리스 신화 속 주인공, 테세우스(Theseus)가 되살아나 켄타우로스를 몽둥이로 때려잡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좌중은 고요하다. 이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에 내가 와 있는 것이다.
색채 대리석과 벽화로 뒤덮인 넓은 계단 실에, 미술관을 오르는 계단 중간의 시선이 집중되는 자리에 이 조각상이 우뚝 서 있다.
작가는 신화 속의 용맹스러운 용사를 어쩜 이렇게 멋지게 순간 포착해 내는 데 성공했을까?
현장에서 이 작품을 보면 빈 미술사 박물관의 절반을 다 봤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라고 필자는 감히 말하고 싶다.
이 작품에 대해 [빈에서는 인생이 아름다워진다]의 저자 박종호 씨는 이렇게 언급했다. (p.77)
이 거대한 대리석 조각은 빈의 정신을 천명한다.
...
19세기 말 빈의 대표적인 건물에 서 있는 조각상이 무언으로 웅변하는 것은 바로 부모와의 단절에 의해 비로소 그들 1900년의 위대함이 이뤄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빈에서는 인생이 아름다워진다 - 박종호
테세우스는 크레타섬에서 또 다른 반인반수 괴물인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괴물은 테세우스의 생부였다는 말이 있다.
즉, 아테네의 왕이 되기 위해 자신의 친 아버지를 죽이고 마는 것이다. - 상기 책에서 인용.
19세기 말은 빈의 예술가들이 화려했던 과거를 벗어던지고 시민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붕괴되고 공화정이 등장하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은 더 이상 과거 귀족의 취향에 맞춘 작품을 내놓지 않고 자신의 취향에 따른 예술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세기말, 과거의 유산을 벗어버리지 않고는 새로운 예술을 창조할 수 없다는 그들의 문제의식을 표상하는 작품이 바로 안토니오 카노바의 [켄타우로스를 제압하는 테세우스]였던 것.
이러한 함축적 의미를 내포한 조각상이 홀의 정중앙에 위치하여 방문객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근육과 힘줄, 역동적인 자세는 보는 이들에게 신화의 현장을 현현하기 때문에 숨죽여 쳐다볼 수밖에.
대리석을 이토록 역동적인 모습으로 표현해낸 예술가의 솜씨에 찬사를 보낸다. 대리석의 표면이 또 얼마나 매끄러운가!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신화를 인간의 이성이 동물의 본능을 정복하는 알레고리(Allegory)로 보았는데, 안토니오 카노바의 이 작품도 그러한 생각을 대변한다.
이 작품은 나폴레옹(Napoleon)이 밀라노의 Corso를 위해 의뢰하였는데,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오스트리아 프란츠 1세가 가져왔다.
1822-23년 이 조각상은 빈으로 옮겨지게 되고 호프부르크 왕궁의 Volksgarten의 테세우스 사원에 전시되었다가 1891년 새롭게 빈 미술사 박물관이 건립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고개를 들어 천정을 보면 검은색 대리석의 코린트식 열주가 떠받치고 있는 화려하디 화려한 천정이 보이고 그 아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가 그린 벽화가 보인다. 클림트는 아치의 둥그스름한 곡선에 맞추어 반원의 크기로 벽화 시리즈 작품을 그려넣었다.
벨베데레 궁전 갤러리에서 소개될 [키스]처럼 화려한 금박을 입힌 작품들과는 결이 전혀 다른 젊은 시절 클림트의 작품이다.
역시 기본기가 다 훌륭한 분들이다. 피카소의 경우도, 젊은 시절 작품을 보면 전혀 그의 작품이라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인물화를 잘 그렸다.
이 작품만 봐도 빈 미술사 박물관의 본전은 뽑았다는 말이 빈말이 아닐 것입니다. 빈말(Wien word). ㅎㅎ
그 우편으로 카노바의 작품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두상이 있다.
미술사 박물관을 설계한 고트프리트 젬퍼. 다부진 입매에서 원칙주의적인 그의 성격이 배어나온다.
독일 건축가이자 미술 평론가로 다양한 건축물을 남겼는데 빈 시청사와 독일 드레스덴의 오페라 하우스도 그의 작품이다.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매년 열리는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오페라 공연 장소로 유명한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Bayreuth Festspielhaus)도 그가 설계한 것이다.
호기심 어린 얼굴로 계단에 오르는 이들을, 혹은 충족된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관람객들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것 같다.
이러한 공간을 창조해 일반 시민들로 하여금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한 점에 대해 스스로도 얼마나 기쁘겠는가.
미술관은 1층에 위치하고 있다. (Entrance 는 0층, 1층 사이에 Mezzanine 0.5층으로 구획)
처음 소개할 작품은 유아동 서적에도 등장하는, 우리 아들도 신기한 듯 응시하고 있는 그림부터 시작한다.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7-1593, 밀라노 태생)의 꽃과 과일, 곡식으로 치장한 작품 세트.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궁정화가였다.
왼편의 두 작품은 그의 사계절 작품인 [봄, 여름, 가을, 겨울] 가운데 여름(위), 겨울(아래)이고, 오른 편의 두 작품은 4원소 [땅, 불, 물, 공기] 중 불(위), 물(아래)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림은 시간의 흐름을 소년-청년-장년-노년의 얼굴로 세월의 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의 경우 촛불로 머리가 활활 타오르고 있고, 게, 가재, 물고기 등으로 [물]그림을 재밌게 표현했다.
여름 사진의 경우 화가의 서명과 날짜가, 겨울 작품에는 막시밀리안 황제를 상징하는 M자가 지푸라기(straw) 위에 교묘하게 새겨져 있다.
지구를 구성하는 4원소 작품은 막시밀리안 2세에게 바쳤던 것으로 세상을 채우는 4원소처럼 황제의 위대함을 칭송하기 위해 그렸다고 한다.
사계절 작품의 경우는 이곳뿐 아니라 루브르 박물관,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 등에도 소장돼 있다.
유럽 미술관에 갈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그림이 있다. 여기도 어김없이!
여러 화가들의 공통된 주제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홀로 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른 그림처럼 살인 장면을 잔인하게 묘사하지는 않았구나.
왼편 그림은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56)의 작품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인데, 목을 자르는 유디트의 억센 팔과 목에서 솟구치는 핏줄기가 침대를 적시고 있다.
피가 낭자하는 모습은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
젠틸레스키는 서양 미술사에 등장하는 첫 번째 여성 화가라고 한다.
상기 작품의 경우 엷은 미소까지 머금은 유디트에 비해 젠틀레스키의 유디트는 자신을 강간한 남자의 목을 베는 복수심에 불탄 여인의 모습이다.
같은 여성이었기에 공감할 수 있었고 화가의 감정이 캔버스에 그대로 표출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그림은 너무도 강렬해서 오래도록 보면 정신 건강에 해로우니 퀵하게 Scroll-down 하시길.)
한편, 벨베데레 미술관에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Judith I] 작품이 있는데 그 작품은 전통적인 유디트 이미지를 약간 관능적인 이미지로 틀어버린 것이라 비교 대상은 아니다.
상기 작품은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작품이다.
그림 속 교도들이 1만 명은 되지는 않지만 저 멀리 발가벗긴 채 언덕에서 떨굼을 당하는 이들부터, 가까이에는 나무 십자가에 매달린 이들도 보이고, 나무망치로 맞는 이들, 눈을 가린 채 교수형에 처해진 이들 등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담았다.
이것은 도대체 어떤 장면이란 말인가.
전설에 따르면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Hadrian)는 9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교도 왕자 Achatius를 데리고 온다.
하늘의 천사들은 그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조건으로 그들에게 승리를 약속한다.
개종한 이들은 모든 고통을 완강히 견뎌냈으나 이들의 대열에 잠입한 적군 1천 명에 의해 모두 순교자로 죽어가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뒤러(Dürer)는 그림 중앙에 최근 사망한 인본주의자(Humanist)인 Conrad Celtis 와 함께 이 광경을 한 발짝 떨어져 보는 관찰자(검은 옷 입은 두 사람)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후일 오스트리아 알베르티나(Albertina)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 '기도하는 손'을 보며, 신(God)을 향한 간절함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이 이어진다.
뒤러는 다분히 종교화를 많이 그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천사들이 하늘로 올리고 지상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경배하는 모습.
예수 우편의 초록색 숄을 걸친 사람은 침례 요한이며, 사진에서 흐릿하지만 그의 우측에 하프를 켜는 이는 다읫. 십계명을 들고 있는 이가 모세.
뉘른베르크의 상인 Mattaus Landauer는 나이 들고 궁핍한 자들을 위한 '12 형제의 집'을 지었다.
그는 뒤러에게 연합 예배당의 개축을 의뢰하게 되고 뒤러는 '하늘나라' 공동체에서 천사와 성도가 성삼위일체(Trinity)를 경배하는 모습과 지상에서 이들을 경배하는 모습의 그림을 그린다.
그림의 왼쪽에는 의뢰인이 의인들에 둘러싸여 무릎을 꿇고 있다.
이러한 천상의 환영의 모습과는 별개로 우측 하단에 작은 그림으로 축제의 옷을 입은 뒤러가 보인다.
자신의 서명이 새겨진 비문을 들고 있구나.(아래)
다음 작품은 뒤러가 그린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초상화.
누군가 카메라에 그를 담고 나는 그 누군가를 카메라에 담는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 밝고 선명한 fur 색감으로 인해 황제의 위엄과 힘이 관람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황제가 손에 쥐고 있는 석류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있다.
제국을 위한 대리자로서의 ; 혹은 페르세포네(Persephone)의 신화와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로서의 ; 혹은 1492년 이베리아반도에서 십자군에 의한 이슬람 무어인들의 보루인 그라나다 정복의 의미로서의 해석들이 그것이다.
자 다음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패턴, 아담과 이브에 대한 연작.
태초의 커플인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나무(Tree of Knowledge)'를 중심으로 각각 2개의 패널로 분할된 한 작품이다.
이렇게 두 개의 패널로 나뉘게 된 이유는?
조물주는 아담이 잠든 사이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 '여자'를 만들고 아담은 이브를 보고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 2:23]'고 기뻐했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던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로 인해 인류는 죄를 짓게 되고(Original Sin), 평생 동안 남자는 노동의 고통을,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가 아끼는 여자가 건네는 선악과를 물리칠 수 없던 아담은 함께 죄를 짓고 만다.
간교한 뱀이 나무 오른쪽 가지에서 이브를 유혹하고 있다. 이브의 손에는 이미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들려 있구나.
둘로 나뉜 패널이 한 몸이었지만 다시는 합쳐질 수 없는 그들의 모습을 비유하는 것 아닐까 싶다.
실제 패널의 뒷면에는 마리아와 예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아마도 제단화를 장식하는 각각의 날개 패널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화가 Cranach는 종교화임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누드(Nude) 화를 보여주기 위해 성경적 주제를 인용하였다.
자 이제 빈 미술사 박물관의 하이라이트! 피터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의 작품을 소개한다.
그의 이름은 책마다 브뢰헬, 브뤼헬, 브뤼겔 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으나 필자는 '브뤼헐'로 통일한다.
북유럽 화가들이 어떤 주제를 특정 부분을 한정해 의도적으로 그린 그림, 특히 일상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한 그림을 훗날 '풍속화(Genre painting)'라 부르게 된다. 16세기 플랑드르(Flanders)회화를 대표하는 풍속 화가가 바로 피터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이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는 피터 브뤼헐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처음 소개할 작품은 자주 등장하는 그림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농가의 결혼잔치]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는다. 구석 어디에 있는 것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초록색 천을 배경으로 멀뚱히 앉아 있는 여인이 신부이고 (그 천 위에는 종이 왕관이 걸려 있다.) 그 좌측편 오른손으로 음식을 태연히 먹고 있는 남자가 신랑일 것이다.
왁자지껄 음식을 먹고 있는 이들부터, 전면의 음식을 운반하는 사람들, 우측의 프란치스코 회 수도사, 검은 옷을 입고 개를 데리고 온 장원의 영주(맨 오른쪽) 등 인물들로 가득차 있다.
작품의 제목이 힌트가 아니라면 결혼 잔치인 지 분간이 가지 않을 것이다.
작가는 신랑, 신부에게 강조점을 부여하지 않고, 오히려 흰색의 앞치마를 두르고 전면에 음식을 나르는 일꾼의 모습, 왼쪽에 식당에 들어오려는 사람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 흰 바지 입은 악사는 음식을 바라보면서 군침을 흘린다. -, 빈 항아리에 술을 따르는 사람과 그 앞에는 바닥에 철퍼덕 앉아 음식을 먹는 아이 등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
모든 세부 요소가 작게 축소되어 있어 더욱 주의 깊게 작품을 살펴보아야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서양 미술사의 대부, 곰브리치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넘치는 기지와 뛰어난 관찰력으로 묘사된 이처럼 많은 일화들보다 더 감탄스러운 것은 브뤼헐이 비좁다거나 번잡스러운 인상이 전혀 들지 않게 그림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식탁은 원근법에 의해서 뒤로 후퇴하고 있고, 인물들의 움직임은 배경에 있는 헛간 입구의 군중들로부터 시작하여 전경의 음식을 나르는 두 사람을 거쳐 음식을 받아 상 위에 올려놓은 사람을 통해 다시 배경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바로 이 음식을 놓는 사람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곧장 조그맣게 그려졌지만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는 흐뭇한 표정의 신부에게로 향하게 된다.
- 서양미술사, E.H. 곰브리치
오오 어떻게 이 그림을 보고 이런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역시 곰브리치 할아버지는 대단하시다!
여하튼 신랑, 신부가 주인공인데 왜 화가는 이러한 그림을 그린 것일까.
일하는 노동자를 전면에 부각시켜 노동의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인데, 그 이유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이웃한 다른 작품을 보자.
[농가의 축제]라는 작품으로, 축제를 알리는 오프닝 댄스를 하는 농가의 모습을 그렸다.
전경 우측의 한 쌍의 커플이 춤추는 무리에 합류하려고 하지만 관람객의 시선은 이내 왼쪽 풍경으로 이동한다.
술이 취해 코까지 벌겋게 물든 사내가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악사에게 술을 권하는 듯하다.
브뤼헐은 주로 농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화폭에 담아냈다. 농부들이 술잔치를 하거나 축제를 벌이고 일하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
이런 성향으로 우리는 브뤼헐이 혹시 '농부 화가'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농가의 모습을 아주 세세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고 당대 북유럽 화가들처럼 그림 공부를 위해 이탈리아를 여행한 화가였다.
그는 분명히 도시 사람이었고, 소박한 시골 생활은 도시 생활보다 덜 위선적이고, 인간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등 인습적인 허식에 가려져 있지 않다. 특권층이 아닌 평범한 필부들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근면한 농부들의 모습을 찬양하였다.
위 그림에서도 브뤼헐의 농민에 대한 시선은 거들먹거리지도 않고, 유머러스하지도 않으면서 농촌의 순수한 생활에 대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다음 작품에서는 인물의 크기가 더 작아지며 캔버스 안에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보인다.
카니발 축제와 사순절과 관련된 네덜란드의 관습을 총망라한 것 같은 이 풍경에서, 브뤼헐은 15~16세기에 마상시합이 실제 발생했던 것처럼 우화적으로 묘사한다.
정면의 왼쪽으로 'Carnival'을 대표하는 뚱뚱한 사내가 드럼통을 탄 채 꼬챙이에 꼽은 고기를 무기인 양 들고 있고, 맞은편에는 긴 제빵사의 삽에 두 마리 고기를 얹고 있는 삐쩍 마른 사람이 보이는데 이 사람이 '사순절'을 대표한다.
이 그림의 곳곳에 배치된 각 장면들이 당시 민속학을 찾아보니 실제로 일치했다는 점에서 브뤼헐의 디테일을 엿볼 수 있다.
또 하나 간과하면 안 되는 부분으로, 1800년대 즉 19세기가 되어서야 장 프랑수아 밀레를 중심으로 한 자연주의가 태동하고, 비로소 농부를 주인공으로 그리게 되는데 무려 300년이나 이른 시기에 브뤼헐은 농부의 모습을 그렸다는 점에서 시대를 선도하는 혁신적인 화가였다는 점.
그림은 가운데 우물(Brunnen)을 중심으로 삼각 구도를 형성하는데 왼쪽 사선으로 카니발 축제가 벌어지는 주택 근처, 오른쪽 사선으로 사순절 축제가 벌어지는 교회 건물이 배치되었음을 설명한다.
자, 다음은 빈 미술사 박물관 리플릿에도 등장하는 피터 브뤼헐의 [바벨탑]이다.
노아의 홍수를 경험한 인간이 다시는 물에 의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하늘에 맞닿을 높이의 탑을 쌓고 있다.
왼쪽 하단의 각진 돌을 옮기는 인부들의 모습과 작업 현장을 시찰하는 왕의 모습이 조그맣게 묘사돼 있다.
브뤼헐의 기념비적이랄 수 있는 이 바벨탑의 구성은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 가장 자주 copy 되거나 변형되고 있다.
바벨탑의 외관은 고대 석조 구조물에 로마네스크 양식을 결합하였다. 그리고 탑에 비해 굉장히 작게 묘사한 플랑드르 항구가 보인다.
바벨탑을 건설하는 수많은 장인들의 노고를 묘사함으로써 자신의 일에 충실하는 '장인 정신'을 강조한다.
필자는 이 그림보다는 농부들을 주제로 그린 이전 그림들이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다.
농부들의 모습을 통해 브뤼헐은 풍속화라는 새로운 미술 장르를 개척한 것이기 때문.
이 작품은 [갈바리 행렬]이라는 작품으로 여기도 예의 수많은 사람들로 화면이 가득 차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는 예수의 모습을 정중앙에 두고 주변의 인물들을 배치하였다.
브뤼헐은 네덜란드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까지 거슬러 올라가 네덜란드의 전통적인 theme를 다시금 소환한다.
예수의 무리를 따르는 일단의 사람들 외에 그 주변을 가득 채운 범인들의 평범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이러한 범인들 속에서 전경의 예수님 당시의 옷을 입고 있는 세 명의 마리아와 요한(John)만이 도드라지게 보일 뿐이다.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시선이 중앙의 십자가 예수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왼쪽의 어느 사건 현장을 향한다.
이런 중요한 사건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평범한 이들의 삶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다른 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일는지.
다음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는 브뤼헐의 [겨울 눈 속의 사냥꾼] 작품이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눈 덮인 겨울 언덕 위에 세 명의 사냥꾼이 사냥개들을 끌고 아랫마을로 걸어내려 가고 있다. 사냥꾼 어깨에는 달랑 여우 한 마리가 매달려 있다. 개들은 지쳐 보인다. 그 옆으로 불을 피우고 돼지를 굽는 가족의 모습이 보인다.
저 멀리 빙판에는 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타거나 컬링? 을 하고 있다. 역시 깨알같은 묘사.
부유한 상인으로부터 달력 그림으로 12점을 의뢰받은 브뤼헐은 작품을 그리게 되는데 그 가운데 한 작품으로 12월과 1월의 시골 마을의 정경을 그리고 있다.
그가 정말 12장을 그렸는지, 두 달씩 묶어 6장을 그렸는지는 모른다. 현재는 5점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망실되었거나 원래부터 없었거나.
이 가운데 총 3점이 빈 미술사 박물관에 있으며 이 작품이 가장 유명하다.
저 멀리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빙하가 얼어 빙판이 되었다. 운하의 색깔과 하늘의 색깔이 똑같다! 마치 하늘도 꽁꽁 언 것처럼.
역사가들이 실제 이 시기를 연구한 바에 따르면, '소빙하'가 왔던 시기로 지금보다 평균기온이 1도 낮았다고 한다.
1도면 크지 않게 느껴지지만 지구적 입장에서는 큰 영향을 주어 - 당시 1500~1600년대는 매우 추웠는데 이 시기에 스트라디 바리우스가 만들었던 바이올린이 특히 유명한 이유가 날씨가 매우 추워 나무가 아주 단단해져 최고의 소리를 냈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템즈강이 얼기도 했는데, 이는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고, 코끼리가 그 위를 걸어가도 괜찮을 정도였다고 한다.- 매우 추웠고 화가도 이 사실을 알아 하늘도 똑같은 느낌으로 그린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면 피터 브뤼헐은 꽤 영리하고 정보를 자주 접할 수 있는 도시에 살며 상인과 자주 어울렸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상인을 대상으로 작품을 파는 화가가 아니었을까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Yet, it is not the sum total of details that make the picture important, rather its overall effect.
- 빈 미술사 박품관 작품 해설 인용
그렇다.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디테일의 총합이 아니라 전체적인 조화에서 오는 것임을.
화가는 날씨가 꽤 추운데도 사냥꾼은 아랑곳없이 언덕을 내려가고, 날씨도 추운데 웅크리지 않고 나와서 불 피우는 이들의 모습과 빙판 위에서 각종 놀이에 빠져있는 아이들에서 각자 모두가 맡은 바 소임을 게을리하지 않는 모습을 찬양한다.
'성실한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프로테스탄트 신앙 - 당시 유럽에 퍼지고 있던 -을 전파라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피터 브뤼헐은 농부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 시대의 분위기를 잘 그려낸 화가였다.
브뤼헐의 작품을 봤으니 나머지 절반의 반은 달성한 셈. 자 나머지 절반의 또 다른 반은 어딨을까요?
이어지는 Part II 에서 찾아보시길 ~
얀 브뤼헐은 피터 브뤼헐의 아들인데, 역시 피는 못 속이는 듯.
이런 정물화 하나 집에 걸어두면 집 전체가 화사할 것 같다. 꽃병에 한가득 담긴 꽃들이 액자를 가득 채운다.
현장에서 자세히 바로 보니 하나도 동일한 꽃이 없는 것 같았다. 저마다 다른 형형색색의 꽃들로 장식돼 있어 너무도 예쁘고 자연스러웠다.
불타는 듯한 튤립과 붓꽃(Iris)의 아래에서 회색-청색-검은색이 섞인 붓꽃(Mourning Iris)이 보이는 데 정물화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꽃이라고.
얀 브뤼헐은 초창기에는 주로 꽃과 과일을 비롯한 정물화를 그렸고 이후 성화, 역사화 등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자 지금부터는 바로크 회화의 거장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작품들을 둘러본다.
대상이 황제인지라 그의 초상이 액자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다.
전투의 지휘관으로서의 용맹스러움을 묘사하기 위해 갑옷을 입고 칼을 찬 모습을 보여준다. (칼 집이 왼쪽에 있으니 오른손 잡이군.)
막시밀리안 황제 1세는 부르고뉴 공국의 마리(Mary) 와 결혼하지만 이른 시기에 황후를 잃게 된다.
한편, 이 결혼을 통해 통해 오늘날의 네덜란드, 벨기에 지방을 합스부르크의 영토에 편입시키는 결과를 얻었다.
훗날, 그의 손자인 카를 5세가 스페인 지방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을 모두 다스리게 되면서 영토 확장을 위한 그의 꿈은 성사되었다. (위키피디아 참조)
투구와 갑옷에 비친 빛의 명암과 반사, 그리고 허리춤에 찬 보호대의 명암 표현 등이 매우 사실적이다.
부르고뉴와 오스트리아의 문장이 그의 갑옷 치맛자락에 달려있고, 부르고뉴 색깔의 휘장이 달린 막시밀리안 1세는 이 그림에서는 황제가 아닌 부르고뉴 땅의 영주로 묘사된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회화가 바로크 회화이다. 바로크 회화에서 두드러지는 역동적인 화면 구도와 인물의 움직임은 이내 작품에 몰입하게 하여 마치 그 상황이 내 눈앞에서 펼쳐진 것 같은 현실감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초상화라 예의 그 역동성은 느껴지지 않으나 얼굴 표정이라든가 칼을 쥐고 있는 손 모양에서 생생함을 전해줌은 물론이다.
이보다 바로크 회화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의 다음 작품을 소개합니다.
인물들의 역동성과 화려한 색감에 관능미까지 느껴지지 않습니까.
보카치오의 데카메론(Boccaccio's Decamerone)에 나오는 에피소드 가운데, Cimon이라는 높은 귀족 집안의 자제이지만 학문과 교양 쌓기에 통 관심이 없던 자가 이피게니아의 잠든 모습을 보고는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학문에 정진하기로 결심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거기서 주제를 따왔다.
세 명의 여인이 파티를 마치고 뒤엉켜 쓰러져 잠들고 있고, 오른쪽에 Cimon 이 광경을 쳐다보고 있다.
잔치에 남은 음식을 원숭이가 훔쳐먹고 있는 모습도.
루벤스는 당대 큰 규모의 화실을 두고 여러 견습생을 거느리며 작품을 찍어(!)내던 사람이었다.
일감이 많아짐에 따라 그는 주요한 부분에 대해서만 스케치를 하거나 채색을 하고 남은 부분은 견습생이 마감하였다.
또한 당대 다른 화가와도 함께 그림을 그렸는데 위 그림의 과일과 풍경은 Frans Snyders의 도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다음 그림은 빈 미술사 박물관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작품.
백옥같이 흰 피부에 양 팔로 몸을 가리고 관람객을 쳐다보는 묘령의 연인이 서 있다.
흰 피부는 검은색 배경과 몸에 걸친 검은 벨벳 같은 펄(Fur)과 대비되어 그녀의 미모가 한층 빛난다.
그림 속의 주인공은 루벤스의 두 번째 아내, Helena Fourment이다.
루벤스는 그녀를 고대 그리스의 비너스를 연상하도록 그렸다. 일찍이 화가는 펄(Fur) 있는 망토를 두른 여성을 그리는 데 익숙했다고 한다.(작품의 소제목이 'Fur'이다)
이 작품의 옆에는 - 한 작품 건너뛰어 - 폴 루벤스의 자화상이 걸려있다.
루벤스는 화가이면서 동시에 외교관 칭호를 받은 사람이었다.
1627년에서 1630년은 외교관으로서의 루벤스가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시기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가톨릭 지배에 저항하는 신교 국가인 '홀란드'와 스페인 동맹하에서 안트워프의 지배를 받는 가톨릭교의 '플랑드르'로 양분돼 있었다. 가톨릭 진영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루벤스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안트워프 예수회 교단, 플랑드르 지역의 가톨릭 통치자들 그리고 프랑스의 루이 13세, 마리아 데 메디치 여왕, 스페인 국왕 펠리페3세, 영국 국왕 찰스 1세에 이르기까지 많은 귀족과 황실의 그림을 주문 받았다.
왕실을 오가며 그림을 그리다보니 자연스레 외교관의 역할까지 맞게 된 것.
그 가운데 제일 혁혁한 공적이 소위 '보수 동맹'을 통해 영국과 스페인을 화해시킨 일이다.
귀족임을 암시하는 이 자화상은 그가 자신의 독특한 위치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 지를 잘 보여준다.
- 서양 미술사 인용.
한편, 성공적인 외교관 활약에도 불구하고 외교관 일에 애증이 교차하기도 하였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외교관으로서의 책임감에서 해방되기를 원했고 이 그림에서 보듯 외교관으로서의 제복을 입고는 있지만 이목구비에 더 신경을 쓴 흔적을 보여준다.
옷은 어둡게 얼굴을 환하게 그려 그의 모습을 더욱 부각시킨다.
실제 가까이에서 보면 그의 눈동자와 턱수염 등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손에 쥔 칼과 같은 대상에는 루벤스 특유의 명암 조절이 매우 사실적이다. (3D처럼 캔버스에서 튀어나올 것 같다.)
루벤스는 자신의 작품들을 걸어놓고 관람객을 응시하고 있다. '제 그림 어떻습니까'하는 것처럼.
루벤스 작품 홀이 따로 마련돼 있을 정도로 그의 작품에 흠뻑 취할 수 있다.
루벤스와 더불어 동시대의 화가로 바로크 시대를 더욱 풍성하게 한 또 다른 화가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빛의 화가'라는 찬사와 함께 작품 속의 주인공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묻어 나오는 것 같은 생생한 그림을 그렸다.
필자는 지난 18년, 남프랑스 '그라네 미술관'- 걸어서 미술관 속으로 9편(https://brunch.co.kr/@artelove/10) 에서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고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었다.
만년의 렘브란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그의 추한 모습을 결코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아주 성실하게 관찰했다.
...
이것은 살아 있는 인간의 실제 얼굴이다.
끊임없이 인간의 표정에 내포되어 있는 비밀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탐구하려는 화가의 꿰뚫어보는 응시가 있을 뿐이다.
서양미술사 - E.H. 곰브리치
곰브리치 할아버지는 그의 '서양미술사'에서,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스냅 사진처럼 느껴지지만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인물의 전 생애가 보인다라고 언급하셨다.
필자가 느끼기에도 루벤스의 그림에서는 빛의 명암 효과가 뛰어나고 인물을 돋보이게 묘사하지만,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어떤 진실성이 전달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렘브란트의 작품 하나하나는 모두 감동적이다. (아래 포스트 렘브란트 편 참조 바란다.)
빈 미술사 박물관 - Part 1의 마지막으로, 누구나 좋아하는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의 작품을 소개한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 갤러리 여기저기에 한두 점씩 나뉘어 걸려 있으며, 그를 흠모하는 이들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 하듯 그의 그림을 찾아 세계 미술관을 다닌다고 한다.
필자가 베르메르의 그림을 본 것은 이 번이 처음인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루브르 박물관에도 한 점 있다는 데 못 본 것일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사이즈로 인해 회화 작품을 다 못 보았다.)
베르메르 작품의 특징은 한 마디로 관람객의 시선을 작품 속 주인공의 행위에 집중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화가의 스튜디오]로 번역된 이 작품은 화가가 그의 작업실에서 모델을 두고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여러 알레고리가 숨어 있다.
모델은 포즈를 취하며 화가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모델은 월계관(영광)을 쓰고 있고 한 손에는 나팔(명성), 다른 손에는 두꺼운 책(역사 책)을 들고 있다. 모델은 옛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회화의 영광'을 선포한 여인, Clio로 분한 것이다.
전면에 보이는 큰 폭의 지도에는 17개 주가 남북으로 통일되기 전 네덜란드의 모습이 담겨있다.
지도가 걸려있는 자리에 빛이 새어나는 것으로 보아 창이 있을 것이다.
지도 대신 창을 그리고 자연스레 빛을 들였으면 작품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화가는 그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지도의 틈새 사이로 약하게 새어 나오는 빛이 모델을 지나 화가에게로 향하고 있다. 우리의 시선도 함께.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 가운데, 그 약한 빛으로 인해 강조되는 대상이 부각되는 효과를 의도한 것이리라.
누군가가 화가의 작업실에 살며시 들어와 왼쪽 휘장을 젖히고 화가가 그림 그리는 장면을 보는 것 같다. 그 누군가가 바로 여러분인 것이다!
그림 속 화가는 베르메르 자신을 의미하는데, 비싼 옷을 입고 주황색 스타킹을 신고 있는 모습에서 화가로서의 그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생전에 유명한 화가가 아니었다. 의뢰인이 요구하는 그림을 그려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생계형 화가였지만 신세를 탓하지 않았던 것이다. 채무에 시달릴 때도 그는 이 작품을 내다 팔지 않고 간직했을 만큼 애착을 보였던 작품이었다.
더불어, 대리석 타일 바닥과 디테일한 샹들리에의 묘사를 통해 베르메르의 섬세함을 읽을 수 있고, 원근법에 익숙한 그의 지식을 엿볼 수 있다.
베르메르의 여타 작품에 비해 이 그림은 작품의 구성이라든지 주변 사물의 배치에 있어 가장 복잡한 작품이라고 한다. 캔버스의 크기도 큰 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주변국을 점령한 독일의 히틀러가 이 작품을 손에 넣었는데, 샹들리에 위에 쌍독수리가 그에게 어필을 했을 것이란 얘기가 있다.
장문을 좋아하지 않는 세태를 반영하여 본 포스팅을 2개 Part로 구분한다.
가볍게 보러 들어왔다가 공부만 엄청 하고 엄지로 아무리 올려도 끝날 기색이 읎고 이에 질려 중도에 마치지 못하는 분들을 고려해서.ㅋ (이것도 길다고요?)
Part 2는 루벤스의 남은 작품과, 파올로 베네로세, 카라바조, 라파엘로,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박물관의 최고 인기작 하나 들고 올 예정이니 기대하시길.
* 2022-03-04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