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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남자의 공격패턴과 흩어지는 여자들

by 이라IRA

최근 데자뷰를 겪었던 경험담을 얘기하고 싶다. 거지같고 더러운 기분을 털어내고 해소하는 데에 글쓰기만한 도구도 없으니까.

남자들이 공개적으로 여자를 저격하는 데에 요긴하게 쓰이는게 페미니즘이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으나 그 자리에서 침묵하고 있는 여성들과 느껴지는 힘의 기울기를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이것이 얼마나 기분을 더럽히고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는지 모를거다.

특히 책 읽는 척 하는 남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여성에게 보이는 공격양상 중 대표적인 게 ‘페미니즘 까기’라는 점을 얘기하고 싶다. 짧은시간동안 같은 사람이 아닌 다른 두 사람에게서 동일한 패턴의 공격을 받고 나자 ‘개인적인 성애에서도 항상 구조적인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했던 우에노 치즈코의 얘기가 매우 구체적으로 피부에 와닿았다. 당시엔 다소 형이상학적으로 느껴졌던 책 속 내용을 직접 생경하게 체감하고 있는 꼴이다.

한 번은 비슷한 나이대의 가까웠던 남사친(?)에게서였다. 어느날부터인가 준 포르노의 야동영상을 추천하는 행동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고 선을 긋자 단톡방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조롱으로 나를 공격했었다. 벌렁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 놈과의 인연을 끊어내고 또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얼마전, 이번엔 모임 내의 70살이 다 된 한 노인네가 불편한 플러팅을 시작했다. 같은 운영진이었던데다, ‘어른공경’에 대한 의무감을 갖고 있던터라 처음엔 견뎌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역시 명확하게 선을 긋자 그 할배또한 페미니즘을 수단으로 똑같이 공격을 가했다. 이런 웃기지도 않는 데자뷰를 도대체 몇 번 더 견뎌야 하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책에 대해 그는 ‘이 책이 반페미이기 때문에 수상한거다.’ 라는 논리를 펼쳤다. ‘ ’할배야, ’파아노 치는 여자‘ 그 책을 쓴 옐프리데 옐리네크는 상당수의 페미니즘 작품들로 굉장히 유명한 작가야.’ 그 작가가 ’반페미의식‘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할배의 논리에 적극적으로 반박하는 여성회원은 놀랍게도 나 외에는 한사람도 없었고 그날 나는 가치없고 수준도 없는 그 대화를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외롭기 그지없게 느껴지는 싸움이 의미없다고 생각되어 금방 토론을 포기했었다.


페미니즘으로 ’저 여자를 공격하겠다고‘ 마음먹은 자리에서 지원을 받을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몇몇 남성회원들과, 불편하고 부당하다고 느끼면서도 침묵하는 여자들은 보통 같은 공간에 앉아있다. 간혹 희생자를 지지하는 여자 회원이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매우 우회적이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항상 본질을 비켜간다. 남성회원들의 비위를 거스를까봐 두려운 것이다. 아직까지의 힘의 균형? 성별권력의 기울기를 감안한 생존전략? 오케이.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자신에게도 쏟아질 비난과 공격을 피하기 위함을 넘어 그들의 칭찬을 받기 위한 처신이 더 역하다고 한다면 심한 비난일까? 여성의 ‘리버럴한 의식’이 수직 상승한다는 통계를 사실상 전혀 체감하지 못했던 그 날의 데자뷰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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