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반페미니스트들이 헤어스타일 때문에 안산 선수를 공격합니다." (독일 슈피겔)
'젠더 갈등'이나 '페미니즘' 논란이 아니다. 성차별적 혐오 공격에 시달린 2021 도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양궁 국가대표 안산(21) 선수의 이야기다.
안산 선수는 최근 '페미니스트'에 '남혐'(남성 혐오) 용어를 썼다며 SNS 테러를 당했다. 인신 공격성 욕설 메시지는 물론이고, '페미니스트'와 '남혐' 용어 사용을 사과·해명하라는 댓글이 쏟아졌다. 문제를 제기한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안 선수의 금메달 박탈을 위한 조직적 항의 움직임까지 보였다.
그들이 안 선수를 비난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전라도 광주 출신에 여대 재학 중인 안 선수가 프로필 사진에 세월호 배지를 달았고, '숏컷'(쇼트컷)을 했으며 SNS에 '웅앵웅' '오조오억' 등의 '남혐' 용어를 썼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라는 것.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이유일뿐 아니라 특정 지역과 여성 및 약자를 공격하는 일간베스트저장소 등 커뮤니티의 혐오 정서와 유사한 논리다. 합당한 근거라며 내세우는 '남혐' 용어들 역시 특정 남초 커뮤니티에서 '반페미니즘'을 위해 제기한 일방적 논란에 불과하다.
여성 인권 운동인 페미니즘에 '과격' '극단' 프레임을 씌워 '욕'이나 '해명할 논란'으로 낙인 찍는 분위기가 오히려 한국 사회 뿌리 깊은 여성 혐오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이달 우리나라는 선진국 지위를 획득했지만 성차별 해소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한국의 성평등 지수는 153개국 중 108위(2020 세계경제포럼 발표), 남성대비 여성 임금비율은 67.8%(2019 고용노동부 조사),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9%·전 세계 121위 수준(2019 국제의회연맹 보고서)이다.
안산 선수 사건을 다룬 주요 외신들의 보도는 이 같은 한국 사회 흐름이 얼마나 위험한 '시대 역행'인지 보여준다. 이들은 이번 사건을 '젠더 갈등'이나 '페미니즘 논란' 등 안전한 회피성 단어가 아닌 '반페미니즘' '혐오' '학대' 등으로 규정했다.
BBC는 "안산 선수가 온라인 학대를 당하고 있다"고 보도했고, 서울 주재 특파원 로라 비커는 SNS에 "한국이 성평등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데,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야 한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더러운 의미의 단어가 돼 버렸다"고 비판했다.
로이터 통신도 이 같은 논란을 '온라인 학대'라고 지적하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2개나 딴 양궁 선수의 짧은 헤어스타일이 한국 내에서 '반페미니즘 정서'를 불러일으켰다"며 "'숏컷' 헤어스타일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건 한국 청년들 사이 고조되는 반페미니즘 정서를 기반으로 한다"고 전했다.
AFP통신은 "몇몇 남성들이 안산 선수의 헤어스타일이 '그가 페미니스트임을 암시한다'면서, 그들 중 일부는 안산 선수에게 사과하고, 올림픽 금메달 반납을 요구하기도 했다"며 "한국은 세계 12위 경제 대국이자 최고의 기술 강국이지만 여전히 여성의 권리에 대한 지표가 좋지 않은 남성 중심 사회"라고 짚었다.
슈피겔은 "한국의 반페미니스트들이 안산 선수를 공격했다"며 "그들은 안산 선수의 기록이나 운동 능력이 아닌 외모에 주목한다. 안산 선수의 짧은 머리 스타일이 페미니스트라는 증거라며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뉴욕타임스 서울지부 켈리 카술리스 조 객원 기자도 SNS에 "안산 선수가 짧은 헤어스타일이라는 이유로 남성 네티즌들로부터 비난받는데, 헤어스타일이 아직도 특정 그룹 사이에서 논쟁거리일 정도로 반페미니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며 "헤어스타일 하나로 혐오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일침했다.
'남혐' 손모양이라며 질타 받은 GS25와 동서식품 스타벅스 캔커피 홍보물. 해당 기업들은 이를 사과하고 홍보물을 수정했다. GS25, 동서식품 SNS 캡처그렇다면 왜곡된 혐오 정서는 어떻게 정당한 행동과 신념이 될 수 있었을까. 페미니즘 '백래시'(주로 사회·정치적 진보한 변화에 대해 나타나는 반발 심리·행동)에 동조한 한국 사회 전반에 책임이 있다.
20대 남성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고자 여성 혐오 정서를 이용해 반페미니즘 기조를 확산시킨 정치권, 전 세계 공통 '작다'는 뜻으로 통용되는 '집게 손가락 모양' 억지 논란에 고개 숙여 승리의 경험을 쌓게 한 기업들과 공공기관들, '백래시' 현상에 대한 가치 판단 없이 조회수 경쟁과 받아쓰기에만 열 올린 언론. 누구 하나 피해갈 수 없는 반인권적 행보였다.
국내 29개 여성단체들이 모인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30일 논평을 내고 "'숏컷이라서', '페미니스트라서'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은 2021년 한국사회의 만연한 혐오와 차별을 보여주고 있다. 페미니즘의 정의를 '남성혐오'라 왜곡하고, 특정 외모표현을 가지고 페미니스트라고 낙인찍고 억압하려 하며, 성차별적인 괴롭힘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나오는 억지 주장과 생트집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지난 몇 개월 동안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지금의 사태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며 "사기업, 국가기관, 정치권, 언론들이 억지 주장에 동조하고 이를 이용한 결과, 여성 개개인에 대한 폭력이 난무하게 됐다"고 꼬집었다.
결국 이 사회에서 올바른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권력 집단들이 성차별 해소는 커녕 '여성 혐오'를 부추겨왔던 셈이다. 사회가 용인한 '반페미니즘'은 안산 선수 개인을 넘어 여성 전체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이 온라인 괴롭힘은 안산 선수 개인뿐만 아니라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페미니스트 여성 전체를 위협하는 일이다. 남초 커뮤니티는 언제든지 여성들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여성의 자기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회경제적 지위와 정치·사회·문화·체육·예술 활동 등을 위협하고 있다"며 "온라인 일부 공간에서 남성이 자기 위안과 유희의 도구로 페미니즘 탓하고 공격하는 것을 정치가 이용했고 사회가 받아준 결과"라고 강조했다.
특히 정치권을 향해서는 "여성혐오 정서를 적극적으로 조장해 제1야당의 대표가 된 정치인과, 여성혐오를 시대 흐름으로 오인하고 이들의 표를 얻기 위해 '나는 페미니스트 아니야', '나는 페미니즘 반대해', '젊은 남성들이 공정한 사회 만들어야지'라고 열심히 주장했던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지금 이 사태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된 낙인과 여성혐오의 확산 책임은 여야 정치인 모두에게 있다. 여성혐오를 포함해 소수집단에 대한 혐오에 기생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정치를 멈추고 이 사태에 대해 제대로 응답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안산 선수는 30일 열린 양궁 여자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최초로 올림픽 양궁 금메달 3관왕에 올랐다. 차별과 편견을 뚫고 꿋꿋이 역사를 써낸 안 선수에게 뜨거운 박수가 쏟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2021.07.30 노컷뉴스 링크
=> [다시, 보기]사회가 동조한 '백래시'…예견된 안산 '마녀사냥' - 노컷뉴스 (nocu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