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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의 원인제공?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

by 이라IRA

야심한 밤 술 기운에 절어 널브러져 있는 한 여인, 짙은 화장과 짧은 치마를 입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소파에 혼자 아무렇게나 앉아 있다. 주변엔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며 술에 취한 그녀를 흘끔거린다. 자, 이 여인은 이 남자들 중 한명으로부터 곧 성폭력을 당할 만한 사람인가?

사진출처 네이버TV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은 유망한 의대생이었던 대학 시절의 가장 친한 친구가 같은 과 남학생들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한 사건을 두고 훗날 주인공이 주도자와 세상을 향해 복수를 실현시키는 내용이다. 포스터나 줄거리를 훑어 보고서는 예전 엄정화 주연이었던 한국 영화 ‘오로라 공주’ 정도의 (다 죽이는) 잔혹극을 예상하고 관람을 망설였지만 평론가들의 평점을 보고서는 보기로 결정했던 작품.

이미지출처 네이버TV


전도유망한 남학생들의 미래를 망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집단범죄를 은폐해 줬던 학교 측과 그것이 철 없는 어린 학생들에 의해 일어난 ‘범죄’가 아니라 ‘놀이’였고 단순한 ‘사고’에 불과했다고 자기합리화를 하는 가해자들, 더 최악은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혹은 방관하는 태도로 일관했던 주변의 여자 친구들까지, 이 모든 의사결정의 주체들 가운데 지워지고 빠진 존재가 하나 있다면 그건 자살하고 먼지처럼 없어져 버린 피해자이다. 희생된 피해자 또한 전도 유망한 '프라미싱 영 우먼'이었다는 점을 영화 속에서는 주인공 캐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망각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이 점이 기가 막혔다.


술이 떡이 되게 마시면 그 사람의 의사결정권을 박탈해도 마땅한 일인가? 특히 성적 자기 의사결정권, 그걸 행사하는 주체가 여성일 경우 말이다. 만취한 여자를 인격의 주체가 아니라 그냥 ‘떡치기 좋은’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건 다분히 남성 위주의 잘못되고 폭력적인 생각이다. 여자가 만취해서 비틀거리면 표적으로 삼아도 좋고, 그래도 싸다는 인식은 도대체 누굴 위해서, 누구로부터 나오는 걸까. 여자도 가끔 길에서 자빠져 자고도 싶다, 응? 자빠져 잔다고 강간해도 되는 건 아니야.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러나 그러는 순간 어이없게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자는 ‘성적 대상물’이 된다. 그 순간 그들에게 여자는 인격적인 주체에서 이탈해 자기 의사결정권을 상실해 버리는 욕구해소의 '수단'이자 ‘물건’으로 결론지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뼛속까지 내재하고 있는 국가만이 성범죄 판결에서 번번이 가해자에게 너그러울 수 있다. 죽을 때 까지 트라우마를 안고 갈 피해자를 탓하는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부터 항상 의아했던 점은 왜 성범죄만큼에서는 피해자의 입장을 가장 우선시 하지 않느냐는 점이었다. 끔찍한 성범죄를 당한 피해자의 심정을 왜 그렇게까지 외면하거나 ‘덜 고려’하고 싶어 하냐는 점이었다. 왜 가해자의 형량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안달하는지 의문스러웠다. 이런 성향은 그 나라의 성 평등 지수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이며 여성인권이 낮은 국가들일수록 더 심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감독과 제작은 영국인데도 영화의 배경은 의도적으로 미국으로 했는지도 모른다. 미국은 서방의 선진 국가 중 가장 보수적이고 성 불평등이 심한 나라로 2017년이 되어서야 미투 운동이 촉발되면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보수적인 미국도 한국보다는 성 범죄 형량은 훨씬 높지만 말이다.)

영화의 분위기가 급반전되는 지점이 있었다. 절친의 죽음으로 인해 자기 삶을 포기하고 세상을 향해 소심한 복수를 이어가던 주인공 캐시가 새 연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다시 자신의 인생을 찾는 듯 했던 지점, 그것이 폭풍전야였을 줄이야. 이 영화가 호평을 받고 빛을 발하게 된 요인이 아니었나 싶다.

결말이 비록 권선징악으로 매듭지어졌어도 영화를 보고 나서 통쾌한 기분은 없다. 조금도 기쁘지 않아. 100%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린 이 영화는 피해자와 그 곁에 남겨진 사람들의 심정처럼 처참하고 슬프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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