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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의 가스라이팅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

by 이라IRA


풋풋한 웃음과 설레는 썸타기, 딱딱한 교복도, 헤어스타일에 대한 어떤 제제도 없는 자유분방한 외국 10대들의 학교생활을 보는 즐거움은 내가 하이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다 자라고 나이 들어 이제는 10대에서는 한참 멀어진 지금도 이건 여전히 재미가 있다. 다만, 세상 진지하게 공감하고 빙의(?)했었던 그 시절과는 다르게 지금은 순전히 킬링 타임용으로 보고 있지만 말이다. 킬링 타임용이라 할지라도 지루한 일상 속, 작게나마 상큼 발랄(?)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꾸 보게 되는 장르이기도 하다. 10년도 더 되었지만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 또한 그런 마음으로 접근했었다. 그러나 웬걸, 영화에 담긴 스토리는 단순히 풋풋하고 설레는 10대의 소녀들의 스토리가 아니었다.


movie_image (7).jpg 사진출처 네이버TV

원 제목 ‘Mean girls’, 비열하고 잔인한 소녀들이라는 제목이 주는 암시와 같이 한국으로 의역된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이른바 학교 내의 걸그룹과 같은 실세 여학생들의 주도권 쟁탈전과 ‘학교 내 정치’를 그리고 있는 영화였다. 예쁘장하면서 못된 아이들의 서바이벌전, 권력다툼이랄까? (무슨 정치 사극도 아니고..) 그런데 이런 주제를 이렇게나 재미있게 다룰 수 있는 영화 감독에게 완전 반해버렸다. 10대들만이 가질 수 있는 풋풋함과 설레는 로맨스 등 하이틴 물의 여러 가지 흥미로운 요소들을 맛갈나게 버무렸던 지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볼 수 있는 영화였지만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다른 하이틴 영화와는 차별화된 보석 같은 또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학창시절에 한번 쯤 좋아서가 아니라 동경의 대상이거나 힘이 세서, 혹은 두려워서 붙어 다녔던 친구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회상해 보면 여학생의 세계에서는 그런 경향이 강했던 것 같다. 여학생 중 예쁘고 공부를 잘 해서, 혹은 엄친딸이어서, 소위 요즘 말로 교내 ‘인싸’로 통하는 친구여서 그와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해보았거나 반대로 내가 그 ‘인싸’가 되 보았던 경험 말이다. 교내의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그 친구를 알고 있고 학생들뿐만 아니라 선생님한테까지 주목을 받는 아이, 여학생들 사이에서 동경의 대상인 그 친구의 옆에 바짝 붙어 있을 수 있다면 나까지 주목 받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아이들은 그런 달콤함을 쉽게 따라간다. 근데 생각해보니 아이들 뿐만은 아닌 것 같다. 잘 나가는 유명인사와 가깝게 지내고 싶은 마음은 어른들이 더 강하지 않나. 이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세속적인 대중 심리의 공통분모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그렇게 사귄 친구 관계는 그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서열이 생기게 된다는 사실이다. 여학생들의 우정은 비교적 수평적이며 서로 동등한 사례가 많지만 ‘인싸’를 중심으로 한 그룹(?)은 다르다. 그룹의 중심 역할을 하는 아이가 여왕벌, 퀸 역할을 거머쥐게 되는 ‘서열 조직’이 되기 쉬워진다는 말씀. 그들이 설령 학생들, 아이들일지라도 말이다. (아이들이 순수하다고 생각해? 노, 아이들처럼 속에 내재된 악마성을 쉽게 드러내는 존재들도 없다.)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바로 여학생 조직(?)의 이러한 현상을 깊게 파고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근데 어쩜 이런 얘길 이렇게 위트 있고 재미있게 풀어 낼 수 있을까? 린제이 로한 Linsay Lohan과 레이첼 맥 애덤스Rachel McAdams를 단번에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이 영화가 한 때는 너무 재미있어 몇 번은 다시 돌려봤던 기억이 난다. (여기서 레이첼 맥 애덤스가 여왕벌 역할을 하는데 아, 레이첼, 심하게 예쁘게 나온다.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어린 시절 모습도 볼 수 있는 영화.)



movie_image (6).jpg 사진출처 네이버TV


여기서 퀸(여왕벌, 인싸라는 단어 대신 퀸으로 통일하련다.) 역할을 하는 아이가 마냥 선하기만 하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퀸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많은 경우 ‘조직 내 정치’를 한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 ‘정치’라는 좋지 못한 단어에는 거짓말, 이간질, 부정적인 압력행사 등의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퀸은 이러한 전략을 최대한 조용하고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너무 티나게 했다가 삐끗이라도 하는 날엔 ‘하위 친구들’의 반란이 일어날 각오를 해야 한다. 이들이 서로 뭉쳐 대항하면 퀸의 지위는 끝장이다. 퀸은 이들이 서로 분열되고 자신에게 더 가까워지려는 경쟁을 펼칠수록 지위를 더 공고하게 유지할 수 있다. 애들 세계 치고 너무 잔인하다고? 얘기했잖아요, 아이들이 더 잔인하다고.


movie_image (5).jpg 사진출처 네이버TV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퀸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예쁘고 못되기만 한 레지나(레이첼 맥 애덤스 배역)에 대항해 플라스틱(학교 내 걸그룹) 멤버 에 편입한 똑똑한 전학생 케이디(린제이 로한 배역)가 조용하게 반역을 꾀하는 과정을 너무도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있다. 고군분투 끝에 레지나를 무너뜨리는 데에 성공하지만 그런 그녀가 점점 레지나의 모습을 닮아간다는 점이 다소 충격적이고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결코 만만하지 않은 레지나의 반격은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심장 쫄깃하게 만들었고 이후의 결말까지, 숨 고를 틈도 없이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스토리와 10대 청소년들이 맺고 있는 우정의 리얼리즘을 잘 묘사했다는 점에서 적극 추천하고 싶다.


그런데 가만, 이들의 모습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조직 내의 우리 사회인의 그림과 너무 닮아 있지는 않은가? 이 영화를 접할 당시 나는 입사한지 몇 년 지나지 않은 사회 초년생이었는데 영화에서 봤던 서바이벌전이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서열 싸움과 정치질(?)은 직장 내에서야말로 빈번하게 일어나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내 경우 10년 넘게 회사를 다니면서 꽤나 많이 봐 왔고 경험했던 모습이었다. 다만, 10대때와 다른 점은 사회에 나와서는 이런 행각들이 더 은밀하고 소리 없이, 친절과 걱정, 친밀함을 가장하여 일어난다는 점이었다. 특히 상호 수평적인 관계보다 상하 서열이 뚜렷한 조직일수록 더 쉽게 겪을 수 있었는데, 아, 다시 돌이켜 봐도 치가 떨린다. 내가 당하는 입장이 될 때도 있었고 부끄러운 얘기지만 내가 가해자 역할을 자처할 때도 있었다. (나도 살고자 그랬다고 한다면 너무 빈약한 변명일까.)




‘가스라이팅’, 이 단어가 우리에게 알려지기 전까지 명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딱 집어 설명 못했던 행동과 현상들, 영화에서 퀸 레지나가 무너지기 전까지 레지나를 두려워하면서 그래서 그녀에게 더욱 의지해야만 했던 레지나의 친구들. 조직 내 팀장이 두려워 그가 가하는 교묘하고 선의로 위장된 정신적인 학대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더 잘 보이려고 애쓰는 팀원, 우리는 이제 이것을 ‘가스라이팅’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딱 집어 말할 수 있는 단어가 나와 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시원한지? 잔인한 단어이지만 이 잔인함을 무겁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게, 감동적으로 잘 풀어낸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하이틴 영화중에서 단연 최고작으로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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