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해리에게>
나는 은호가 참 좋았다. 어떻게든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멋졌다. 솔직한 순간도, 솔직하지 못한 순간도, 미련이 남은 순간도, 단호한 순간도, 은호의 모든 순간이 좋았다. 은호가 ‘나는 내가 싫다’라고 적는 순간 얼마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는지 모른다. 그 표정과, 손과, 문장과, 호흡이 부정하고 싶을 만큼 너무 익숙하게 느껴져서.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전혀 그렇지 않아.”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땐 그 말이 전혀 닿지 못한다는 것도 알기에 더 아팠다. 결국 너무 버거워서 혼자 숨어버린 은호가 아팠다. 진심을 다해 꽉 안아주고 싶었다. 누구든 다시 따듯한 품을 확인시켜 주기를 바랐다. 힘들 때 내가 그 무엇보다 간절하게 원했던 것이니까. 포옹은 나 자신이 지독하게 싫어질 때 유일한 위로처럼 느껴졌다.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하는 이야기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내가 정말 보고 싶었던 건 사랑의 상처를 좋은 이별로 치유하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은호와 현오가 다시 함께 하게 된 결말에 기뻐하면서도 조금은 씁쓸함을 느꼈으니까. 두 사람이 돌고 돌아 서로의 곁으로 돌아온 것은 그 계기와 과정이 어떻든 엄청난 행운이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대체될 수 없는 사람도, 그 사람만 치유해 줄 수 있는 상처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런 결말도 있는 법이다. 현실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결국 손을 맞잡게 되는 끝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조금은 다른 가능성의 세계도 기대해 보았다. 그토록 놓아주기 어려운 현오에 대한 마음과 잘 이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정말 가능한지, 어떻게 할 수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서 더 궁금했다.
은호가 했던 이별의 말.
아니. 나 절대로 아프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건강할 거야.
그렇게 보란 듯이 잘 살아 볼 거야.
잘 가. 인사는 이렇게 하는 거랬지?
잘 가, 정현오.
그리고 이별의 독백.
‘알아. 네가 다시 돌아오면 나는 많이 아플 거야.
우리 서로를 책장에 넣어둔 채 다시는 꺼내보지 않기로 해.
마음에 담고 영영 그리워하지 않기로 해.’
드라마에서도, 현실에서도 그 다짐이 결심한다고 해서 바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좋은 이별로 사랑의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도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불행의 대가로 존재하는 그런 엄청난 보석은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건 단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단번에 마음을 고쳐 먹는 것만으로 쉽게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간의 힘든 미련과 기대와 좌절을 다시 반복해서 마주해야 할 것이다. 주연이와 이어진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을 것이다. 단번에 해결되는 문제는 없을 것이다. 특히 그것이 사랑이라면 더더욱.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은호가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혜리와 함께 찾아낸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 같다.
사랑을 찾으면서도 절대로 찾지 못할 것 같다면 당신은 이미 넘치도록 사랑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애는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부류의 사랑은 빗속에서 입을 맞추거나,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하는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영감을 주고 다시 기운을 차리게 해 준다. 당신이 울면 안아주고, 당신이 행복해하면 축하해 주고, 당신이 취하면 같이 노래를 불러줄 것이다. 당신은 이런 사랑에서 많은 것을 얻고 배운다. 이런 사랑이라면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 최대한 곁에 두기를.
-『사랑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것』, 돌리 앨더튼
나는 은호가 이런 사랑을, 사람을, 관계를 경험해 보기를 바랐나 보다. 만약 상대가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면, 그토록 원하는 것을 결국 줄 수 없었다면, 그 상처는 치유될 기회조차 찾지 못하고 그렇게 방치되어 있어야 하는 걸까. 그 모든 만약을 뛰어넘는 마음으로 결국 두 사람이 함께하게 된 결말은 근사하다. 다만 익숙하지 않은 그 새로운 가능성을 은호가 더 궁금해하고 소중히 들여다보기를 바랐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다른 종류의 관계와 마음을 겪다 보면 아마 행복을 향한 또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주연이와의 관계를 훌훌 털어내는 모습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과 마음과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해 보기를 바랐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알고 있다. 사람은 낯선 행복보다 익숙한 불행을 택하니까. 다행히 은호는 익숙한 불행 속 다시 행복을 찾아냈고, 주연이는 낯선 행복을 새롭게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해피엔딩이 아닐까. 무엇보다 은호가 다시 "나도 내가 가장 좋아."라고 말하게 되어서 나도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나의 해리에게>는 나를 살고 싶게 만드는 드라마였다. 우울하고 슬퍼도 결말을 보고 싶다는 결심으로 월요일을 기다리며 한 주를 버텼다. 설렘, 위로, 기대, 흥분이 뒤섞인 마음으로 오랜만에 이야기에 푹 빠져 지냈다. 내가 정말 원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도 깨달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그 이야기는 이제 내가 찾아내면 된다. 그동안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이 드라마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은호, 혜리, 현오, 주연, 혜연, 지온, 수정, 민영 모두에게 내가 그들을 아주 사랑했다고,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살아가면서 마음 한 구석에 소중하게 간직하겠다고,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