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인생아

소설 <저는 38세에 죽을 예정입니다만>

by 아트필러
점쟁이가 예언한 인생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된다면?


늘 기대를 벗어나는 삶에 지쳐 마음이 무기력해지거나,

예상할 수 없는 미래에 마음이 조급해진 당신을 위한 최고의 소설


아무것도 모르고 읽었을 때 훨씬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게 된 지금 이 순간 첫 번째 문장에 해당하는 상황이라면

당장 이 창을 닫고 도서관이나 서점으로 가서 소설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전개 속도가 거침없고, 호흡이 늘어지는 부분 없이 훅훅 읽힌다.

낭만적인 상황에서도 현실 감각을 잊지 않도록 톡 쏘는 타이밍이 탁월하다.


모든 인물들이 매력적이고,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인생의 큰 사건이 닥쳐도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는다.

그 점이 무엇보다 가장 사랑스럽다.


이야기는 명확하고, 끝까지 길을 잃지 않는다.

재밌고 단순하게 다가오지만

그 속에 담긴 질문들은 넓고 깊다.

인생, 사랑, 꿈, 죽음, 관계, 가족에 대하여.


이런 주제의 이야기들은 자칫 잘못하면 설교형으로 빠질 위험성이 높다.

하지만 그건 소설이 삶에 가닿는 방식이 아니다.


이 작품의 훌륭한 점은 소설을 읽는 기분을 끝까지 유지하게 한다는 것이다.

교훈이나 메시지를 전하려는 노골적인 작가의 관점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인물들의 인생을 충실하고, 솔직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면 그냥 인생을 함께 즐길 친구들을 여럿 사귄 것처럼 느껴진다.

삶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자기 계발서를 뒤적거리는 대신

대화를 나눌 저녁이나 산책을 위해 찾아가고 싶은 친구들.


X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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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왼쪽 원서, 오른쪽 번역서)


번역서 표지의 서사적인 일러스트는 매력적인 장면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면,

원서 표지의 직관적인 디자인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마음에 남았던 문장들 (※ 스포일러 포함 주의)


내가 깨달은 진실이 하나 있어.
끔찍한 상황에서도 좋은 일이 생긴다는 거야.
우주가 베푸는······


정말로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나의 의지와 바람은 가볍게 무시한 채 멋대로 방향을 꺾는다.

하지만 종종 퍼즐처럼 모든 일들이 맞아떨어지는 순간들을 겪게 된다.


버스를 놓쳤는데 거기서 우연히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을 만나게 된다거나

걱정했던 실수가 오히려 타이밍이 맞아서 아무렇지 않게 해결되거나


그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마음을 썼는데

'이런 순간을 위해 그랬던 건가' 하고

허탈함과 놀라움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


어째서 우린 매번 빗나갈까?
네가 안정을 원할 때 넌 모험을 택했어.
그리고 이제 내가 좀 더 새로운 곳에서 경험을 얻고 싶어 하니까 넌 안정을 찾으려고 해.

우주가 우리에게 필요한 걸 원할 때 내어주는 거고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쉬울 거야.


엇갈리는 타이밍에 대한 안타까움은 늘 관계에 대한 미련을 남긴다.

그리고 대개 그 미련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다.

하지만 쉽게 훌훌 털어버릴 수 없기에 '미련'이라는 이름도 붙여진 게 아닐까.


사람은 현재만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지금 벌어진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영원히 좋은 것도, 영원히 나쁜 것도 없다.


그러니 매번 희극과 비극에 몰입해 지쳐 나가떨어지기보다

가끔은 다 이유가 있다고 받아들이는 여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야 발목에 미련을 질질 끌고서라도 기어코 걸음을 뗄 수 있을 테니까.


"사랑해요, 엄마."

"사랑한다, 넬. 언제든 엄마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렴. 기차 타면 금방 가니까."

넬은 전화를 끊은 뒤 엄마의 말을 되새겨보았다. '기차 타면 금방 가니까.' 오랫동안 엄마는 넬과 다른 반구에 있었고 어떤 상황에서도 엄마의 도움은 선택지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든 엄마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게다가 전화 한 통이면 폴리 언니도 자신을 도와줄 수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넬은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고 긴장한 어깨도 스스로 풀렸다.


인생에 닥치는 불운, 불행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옆에 손을 뻗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깨에 조금은 힘을 빼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질리도록 반복된 따분한 이야기지만

그만큼 인간이 오랜 시간 공유해 온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저들 중 몇 사람이나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을까?
후회란 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갖기 못한 기회에 대한 것일까?


후회가 없는 삶.

모두가 원하지만 아무도 이룰 수 없는 목표.


한 번에 모든 가능성을 경험할 수는 없기에

인간은 한 것에 대해서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늘 후회를 남긴다.


가상세계, 멀티버스 세계관의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도

그런 욕망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른다.


넬은 죽음으로 평화를 찾으려고 했다.
관계의 주변부에 서 있기만 했을 뿐, 제대로 헌신한 적은 없었다.
톰은 그녀에게 사랑과 행복을 찾을 진정한 기회를 제안했지만 그녀는 그를 밀어내기만 했다.


종종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싶지 않아

모든 관계에 거리를 두는 시기가 찾아온다.


그렇게 쉬다 보면 여유의 틈이 조금씩 늘어난다.

체력을 기를 휴식기도 가끔은 필요하다.


그래야 소중한 사람과 발맞춰 걷거나,

달려가 붙잡을 수 있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세상은 넓으니
신나고 경이로워서 감탄스러운 그런 곳으로 가라는 거예요.

늙다리들하고만 시간을 보내지 말아요.
그들은 자기가 앓고 있는 병이나 죽은 친구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테니까.

젊은이들과 어울리면 당신도 계속 젊을 거고 아주 많은 걸 배울 거예요.


나이가 들수록 삶이 정형화된다고 느낀다.

비슷한 일을 하고, 비슷한 관계를 꾸리고, 비슷한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들로 연륜을 쌓은 노년이야 말로로

새로운 경험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때가 아닐까?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늘 인사를 건네겠다고 약속해."

"그럴게요."

"제대로 약속해." 넬이 웃었고 다시 눈물이 고였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늘 인사를 건네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뭐든 최고를 위해 아껴두지 마. 그런 늘 제일 좋은 수정 물을 마실 수 있을 거야."

"저한테 수정이 있다면 날마다 수정 물을 마실 거예요."

"좋았어. 이제 그만 가서 네 인생을 살아."


나중에 어디선가 만난 아이가

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묻는다면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눈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해 줘야지.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늘 인사를 건네겠다고 약속해,


그리고 뭐든 최고를 위해 아껴두지 마,


좋았어, 이제 그만 가서 네 인생을 살아.


나가며.


스스로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가 아닌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 걸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던 시기에 만난 책이다.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그런 고민들은 답이 없기에 꽤나 지쳐 있었고

소설은 이런 생각에서 잠시 벗어나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인생의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없다'도 주어지는 선택지 중 하나라는 깨달음,

인생의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거라는 믿음.


이런 마음들을 날개로 다니


삶이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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