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너만큼 여기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
미란다 줄라이의 <No one belongs here more than you (너만큼 여기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를 읽었다. <3시의 나>(아사오 하루밍)에서 보고 읽고 싶어 읽게 되었다. 혹시 소개글을 읽고 읽게 되었다는 소개글을 읽고 읽고싶어졌다면 마지막까지 스크롤을 내리지 말고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자. 알고 읽는 건 재미가 없으니까. 책 속에서 책 추천을 받을 때는 설명이나 감상이 장황하지 않고 스쳐지나가는 작품들에 끌린다. 마치 도서관 서가를 훑다가 우연히 발견한 기분이 들어서 두근거린다.
방금 글을 쓰다 깨달았는데 그녀는 한때 나의 롤모델이었다. 그렇게 진지한 무게의 롤모델은 아니었지만, 대학교 발표 시간에 그녀를 소개한 적도 있었다. <예술하는 습관>(메이슨 커리)에서 알게 되었다.
영화 제작자이자 공연예술가이며, 각본과 단편소설, 소설을 쓴 작가이기도 한 줄라이는 엄격한 자기수양 덕분에 그 모든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다양한 장르의 작품 활동과 존경스러운 글쓰기에 대한 집중력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신기한 점은 내가 소설을 읽는동안 전혀 이 이름이 익숙하다고 느끼거나 글에서 이런 작가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조금 더 삶에 시니컬하고 어떻게든 조금은 자포자기해버린 경험이 있지 않을까했는데, 물론 그런 순간도 인생에 있었겠지만 전반적으로 규칙, 죄의식, 독설, 기만 등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나아간 사람으로 소개된다. 그렇기에 이 책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아마 삶에 단단히 옭죄어있기에 이렇게 자유롭고 파격적이고 제멋대로인 인물들을 그려낼 수 있었던걸까.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불건전한 생각을 위해서는 건강한 신체가 필요하다는 문장이 떠오른다. 금욕주의적이고 실제로는 전혀 멋대로이거나 여유롭지 않은 루틴 속에서 살아가는 작가들이 놀랄만큼 발칙한 글을 쓸 수 있는 이유. 아마 정말 퍼져있다면 그 글은 세상에 나와 다른 시대와 공간의 내가 읽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다른 시공간의 독자를 위해 부지런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만약 이 책을 직접 읽어보는 건 체력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무리라면 다음 문단을 읽으시길. 어디선가 들어본 작품의 목록에 끼워넣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인생에 그런 목록이 늘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몇번이고 다시 읽게 될만큼 좋아하는 작품도 함께 있어야겠지만. 읽은 것만 좋아할 수 있다면 인생은 너무 짧고 재밌는 책은 너무 많으니 분명 아쉬울테니까.
<너만큼 여기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라는 제목으로 번역 되어 있어서 뭔가 로맨스인가 싶었는데. 살짝 들춰보거나 첫 장을 읽을때만해도 분명 두근거리는 마음이었는데. 생각보다 끈적거리고 흥분되고, 처절하고, 잔혹하고, 차갑다. 밖에서 읽으면 분명 위험한 책. 그렇지만 마음에 들었다. 오랜만에 읽는 관능적인 소설. 그리고 제목은 '이 곳에 정말 어울리는 건 너뿐이야.'라는 의미보다는 '여기있는 건 너뿐이야.'라는 뜻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근사한 곳에 멋진 상대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면 시궁창 같은 곳에 혼자 헐떡거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어울린다는 건 좋은 건가, 슬픈 건가. 모든 이야기가 아무것도 전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씁쓸한 술맛도, 달달한 초콜릿 맛도 아닌 달콤쌉쌀한 위스키 봉봉 맛이 난다. 그 미묘한 맛이 매 단락의 끝에서 느껴진다. 그래도 이래저래 기분좋게 취하는 건 마찬가지.
쓰다보니 여러 책들이 이리저리 얽혀졌다. 이런 연결의 순간들은 언제나 짜릿하다. 더 많은 책을 읽고 싶은 것도 그 즐거움을 더 자주 느끼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근사한 주말을 위한 추천 작품
달콤쌉싸름한 영화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청춘은 잃어버릴 것이기에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가장 쓸쓸하면서도 너무 다정해서 곱씹게 되는 대사.
같이 청춘을 보낸거니까
누구도 빚진 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