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연극 <Closer>
언제나 선택이란 둘 중에 하나
연인 또는 타인 뿐인 걸
- <서울 이곳은> 가사 중
부고 기자인 Dan은 우연한 사고로 만난 Alice와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새롭게 만나게 된 사진작가 Anna와 서로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Anna의 새로운 애인 Larry까지 등장하며 4명의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네 사람의 감정이 극으로 치닫는 모습을 보면
사랑에 대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새로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게 어쩔 수 없으니
'미안, 내가 이기적이야'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걸까?
사랑이 사고처럼, 운명처럼 찾아오는 거라면
하나의 사랑이 다른 사랑을 망쳐버릴 만큼 더 가치 있을까?
지금은 익숙해진 사람도 한때 분명 새로운 사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강렬한 사랑도 이렇게 사라지는 것 아닐까?
연극 <Closer>는 영국 런던 Lyric Hammersmith 극장에서 봤었다.
나탈리 포트만, 주드로,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인 동명의 영화가 있다.
둘 다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라기보다는 사랑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멜로에 가깝다.
연극과 영화의 캐릭터 설정과 이야기 전개는 거의 같다.
다만 무대에서는 배우들을 통한 캐릭터들의 감정이 가장 강렬하게 와닿고
영화 장면에서는 소품, 의상, 음악, 구도 등이 복합적으로 감정을 보여주는 편이다.
Hello, stranger.
안녕, 낯선 사람.
I'm your stranger. Jump.
내가 당신의 낯선 사람이에요. 여기로 넘어와요.
접미사 '-er'은 두 가지 뜻이 있다.
(형용사형) 더 ~한
(명사형) ~한 사람
그래서 closer는 더 가까운, stranger는 낯선 사람이 된다.
제목인 CLOSER와는 반대되는 stranger라는 표현이 대사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안나의 개인전 테마도 'strangers'이다.
선택의 순간, 'stranger'라는 단어가 마법 같은 최면을 건다.
이건 사랑이 분명하다고.
그렇게 같은 함정에 걸려 넘어진다.
이름을 모르는 낯선 사람과 더 가까워질수록
그 사람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그 사람을 사랑했던 이유를 잊어버리고,
끝내 그 사람의 이름이 다시 낯설게 느껴진다.
그리고 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연인이냐 타인이냐.
낯선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의 끝은
결국 또 다른 낯선 이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She didn't want to be a book. She wanted to be loved.
그녀는 책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사랑받고 싶었지.
이 대사는 연극에만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댄은 안나에게 끌림을 느낀 뒤에도 앨리스를 떠나지 않는다.
앨리스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상처 주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댄은 앨리스를 한 권의 책, 자신의 뮤즈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앨리스는 그의 뮤즈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그가 여전히 자신을 흥미로워하기를, 좋아하기를, 매혹하기를 바랐다.
사랑은 동사가 아닌 명사가 될 때 끝난다.
누군가가 책이 되고, 사진이 되고 애인이 되면,
우리는 그 대상을 더 이상 읽고, 보고,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그 순간을 전시하고, 아름답다고 말하고, 그 자리에 계속 둘 뿐이다.
Winner of the love game.
사랑이라는 게임의 승자
얽혀 들어가는 네 사람의 관계는 어느 순간부터 게임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이든 그 이상이 엮여있든 관계의 우위는 시도 때도 없이 변한다.
순간의 감정과 생각, 말 그리고 선택에 의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곁에 두는 것과 떠나도록 두는 것 무엇이 더 고통스러울까?
이 게임에서 영원히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더 현명한 선택은 무엇일까?
내가 작품에서 깨달은 건 그냥 그 게임을 멈추는 게 답이라는 것.
사랑을 게임으로 생각하는 순간 이미 진심은 중요하지 않게 돼버린다.
내가 우위에 서는 것, 나에게 상처 준 사람에게 복수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그것만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사랑은 지옥이 된다.
설령 누군가를 얻는다 해도 그건 공허함 뿐일 것이다.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그 게임을 그만두고 나오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그 사랑보다 열정을 쏟을만한 가치가 있는 다른 것을 찾을 필요가 있다.
사랑이 끝나는 순간은
상대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때.
나는 네가 그 여자랑 섹스를 했든 안 했든
나를 사랑하든 안 하든 여전히 널 사랑했는데
넌 그게 그렇게 궁금하구나.
사랑한다면서 너한테 중요한 건 내 마음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과 잤는지, 그게 얼마나 좋았는지구나.
근데 난 너에게 원하는 답을 해주고 싶지 않아.
거짓이든 진실이든 아무 상관없어.
이제 널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날 떠나거나 때려도 상관없어.
Alice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이 게임을 끝내면 그만이니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댄에게 매달렸던 앨리스는 호구이거나 가스라이팅 피해자였던 걸까.
헌신을 강요당하는 것과 스스로 헌신을 선택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아주 미묘하고 흐릿한 경계에 있는 문제 이긴 하지만.
사랑에 빠져 바보같이 구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면
진정한 사랑은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는 걸까?
래리와 안나처럼 적당히 마음을 내비치고, 적당히 상처 주고, 적당히 용서하는 것.
아니면 댄과 앨리스처럼 서로의 밑바닥을 처절하게 보여주며 돌아서는 것.
무엇이 진짜 진정한 사랑인 걸까?
사실 사랑은 선택일 뿐 정답은 없다.
건강한 관계의 사랑만 경험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당신을 탓할 필요 없다.
당신은 언젠가 더 나은 선택을 깨달을 것이고,
그 선택을 위한 용기를 낼 것이다.
그 시간들이 당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 한 번쯤 그런 바보 같은 사랑에 푹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너무 많이 아프지는 않기를.
그리고 상처 주었던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침 한 번은 제대로 뱉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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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과 끝에 나오는 음악은 Damien Rice의 The Blower's Daughter이라는 곡이다.
처음엔 Frankie Valli의 유명한 Can't Take My Eyes Off You를 편곡한 줄 알았는데 그 가사가 반복되어 들어가 있을 뿐이다.
이 노래로 시작하는 첫 장면을 아주 좋아한다.
거리에서 걸어가는 두 사람이 우연히 눈이 마주치고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이지만 그래서 슬며시 미소 지을 수 있는 그 순간.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 노래가 나온다.
첫 장면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링의 제인이 길거리를 걸어가고 남자들이 그녀를 훑으며 쳐다본다.
눈을 뗄 수 없다는 말이 로맨틱한 순간에서 혐오스럽게 변하는 순간.
사랑도 처음엔 낯선 사람이기에 운명적으로 느껴지지만,
끝내 낯선 사람이 되는 걸 선택하기에 그렇게 하찮아지는 걸까.
https://www.youtube.com/watch?v=1oZKECU3G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