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먹히고, 사랑하라

영화 vs 소설 <BONES & ALL>

by 아트필러

※ 영화와 책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 작품은 원작 소설과 영화가 굉장히 다르다. 영화보다 책이 더 마음에 들었던 이유를 중심으로 글을 썼다. 단순히 전개가 달라서, 책에서 읽었던 장면이 없어서라기보다 더 근사한 대답을 하고 싶을 만큼 강렬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와 책에서 다루는 리와 매런의 여정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일단 책에서 둘은 서로 먹는 대상이 다르다. 리는 '자신이 역겹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매런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을 먹는다. 그래서 둘은 서로 먹지 않기에, 상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도 생각한다. 함께 했지만 둘은 전혀 다른 길에 있었다. 식인하는 순간에는 철저히 고독하다. 리는 매런이 월마트에서 앤디를 먹는 장면을 보지만, 매런은 한 번도 리의 식인 장면을 보지 못한다. 단지 리가 사람을 먹어 치우는 시간이 타이어를 갈아 끼우는 시간과 비슷하다는 것만 안다. 하지만 영화에서 둘은 ‘함께’ 먹는다. 먹은 뒤 그 행위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람을 먹는다는 행위를 같이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둘은 이미 서로를 이해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설리와도 함께 식인하지만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생각해 볼 지점이긴 하다.


ⓒ 네이버 영화/영화에서 두 사람은 신체적, 심리적으로 훨씬 가까운 관계로 느껴진다.


매런과 리의 관계도 완전히 다르다. 영화 속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유일한, 하나의 사람이지만 책 속에서 둘은 서로에게 누군가를 투영하고 있다. 수도 없이 상상하고 바랐을 사랑하는 사람의 이상적인 모습을 찾는다. 리는 매런을 통해 ‘자신의 바닥까지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연인’을, 매런은 리를 통해 ‘공포나 두려움, 책임감에서 비롯되지 않은 온전한 사랑을 주는 엄마’를 본다. (책에서는 영화와는 반대로 아빠가 식인자, 엄마가 양육자로 나온다.)


책은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감이 좀 더 느껴지고, 매런의 시점에서 리를 바라보는 서술이 많다




리의 이야기 (소설 기준)


리는 불쾌한 사람을 먹는다. 하지만 이건 리에게 아무런 위안이나 면죄부가 되지 못한다. 이건 하나의 트리거에 불과할 뿐이다. 매런이 리의 식인은 정의롭다고 할 때마다 그는 아니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자신의 먹는 행위 그 자체도 불쾌한 것이기 때문에 리는 자신이 이들을 먹는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에게 먹혀야 마땅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누구에 의해서? 정의로운 사람들은 식인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른 식인자들은 자신과 같이 역겨운 존재다. 하지만 매런은 달랐다. 아마 처음부터 알아봤다는 뜻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그녀는 세상을 사랑한다. 희생자들을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다른 종류의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녀는 리가 발견한, 자신이 먹지 않아도 될 유일한 식인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매런을 위협하는 설리를 먹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식인 했다. 먹는다는 그 역겨웠던 행위가 처음으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행위가 된 것이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죽어 마땅한 역겨운 인간들을 먹었지만 설리를 먹을 때 리는 자신의 식인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그럴 수 있음에 감사하며 그 삶을 잠시나마 사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이제 리가 더 이상 사람을 먹을 수 없다는 선고이기도 하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한 욕망의 대상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건 소중한 사람이 위험해지길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그는 자신이 먹어 치우지 않아도 될 매런에게 먹히기로 결심한다. 그런 의미에서 매런을 만난 건 리에게 행운이다.


ⓒ 네이버 영화 / 리 전여친 서사 넣었어도 충분히 로맨스 몰입 가능한데 왜 뺐는지 의문..


리가 7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식인을 마치고, 다른 사람에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건 옛 연인 레이철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사람을 먹는 매 순간, 리는 그날의 식인으로 되돌아가 허기를 채우고 레이철이 문이 열지 않기를 바란다. 그 순간을 계속 반복하고 수정하고 싶어 한다. 아마 리가 살아있는 한 이 회귀는 계속될 것이다. 레이철은 언제나 문을 열 것이고, 리의 세계에서 영영 떠나버릴 것이다. 그래서 리는 차라리 먹히고 싶다. 그 장면 속에서 사람을 먹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먹어 치운 사람이 되고 싶었을 테니까. 그랬다면 레이철은 자신을 위해 울어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매런에게도 절대 자신의 식인 장면을 끝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설리를 먹을 때에도 화장실에 가 있으라고 말한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이분법적이고 단순한 비유지만, 리에게 여동생 카일라와 레이철은 불편한 교회, 메런은 아늑한 유흥가다. 유흥가에서는 자신의 본능과 욕구를 숨길 필요가 없다. 모두가 그걸 드러내도 좋다는 암묵의 약속이 있고, 나보다 더 추한 욕망들이 꿈틀대는 곳이니까. 하지만 그곳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자는 아무도 없다. 구원은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세계에서 더욱 결벽증처럼 존재하는 교회에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일이었지만 리가 카일라에게 차를 선물하지 못한 이유도 그렇다. 이미 한 차례 우연한 고해성사로 인해 교회에서 쫓겨났던 리는 다시는 교회에서 자신의 욕망을 털어놓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카일라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성역이 되었고, 매런은 마지막 자유와 안식을 주며 그를 구원한다.




매런의 이야기 (소설 기준)


매런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식인의 욕구를 제외해도 다른 사람들보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다. 자신이 먹은 사람들의 꿈,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이 그것을 파괴한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단순히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먹는다는 행위에 역겨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 인해 사라진 세상과 그 사람의 또 다른 가능성을 안타까워한다. 그들은 매런이 읽은 책들 속 수많은 캐릭터들과 같은 존재였으니까. 매런이 현실로부터 도망친 세계, 간절히 그렇게 되기를 바랐던 인물들이 있는 책은 그녀에게 자기 자신이 아닌 그녀가 먹은 사람들을 보여줬다. 그래서 책은 유일한 탈출구임과 동시에 그녀를 더 고독하게 만들었다. 그 어느 책에서도 그녀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욕망은 책 속의 상상에서도 승인되지 않은 것이었다. 책 속에서도 그녀는 이해받지 못하는 괴물일 뿐이었고 그녀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다.


ⓒ 네이버 영화 / 전개가 왜 이래? 하다가도 화면 미감 보고 감탄하기 x 무한 반복


하지만 아빠를 찾아가는 과정 속 리와의 만남이 그걸 완전히 뒤바꿔놓는다. 매런은 처음으로 리를 통해 자기 자신을 본다. 리의 이야기, 아빠의 이야기는 매런에게 자신의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어쩌면 이 삶도 존재할만한, 살아갈 만한, 읽어 볼 만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책을 통해 그녀는 세상을 사랑하게 됐지만, 리를 통해 그 세상을 파괴하는 자신을 사랑하게 됐다. 이제 그녀는 그녀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능성의 측면에서 책 속 매런과 아빠의 만남(영화에서는 매런과 엄마의 만남.)이 비극적인 이유는 매런이 상상한 삶이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매런은 아빠의 일기를 통해 본능으로 인해 파괴되어 버린 다른 삶의 가능성을 봤다. 그때 그 친구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엄마가 예정보다 빨리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잔혹한 우연이 삶을 덮치지 않았더라면, 비틀즈 노래를 들으며 아빠와 아침을 먹는 일상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매런이 필연적이라고 여겼던 아빠를 찾아가는 여정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아빠, 매런, 리 모두 허기라는 욕망 때문에 꿈꾸던 삶의 가능성이 파괴된 사람들이다.




설리의 이야기 (소설 기준)

“설리는 네 머리카락을 썼을 거야.”라는 책 속 리의 말은 꽤 오랫동안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건 설리는 매런을 먹은 뒤 그 머리카락을 엮은 뒤 자살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영화 속 매런의 엄마처럼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다고 여겼던 것일까. 사람을 죽이거나 시체를 먹는 자신의 비참한 생애에 비추어 손녀만큼은 자유롭게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일까. 순진한 해석일지도 모르지만, 초반부 설리가 매런에게 대한 태도를 보면 그런 마음이 아주 조금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매런도 그랬듯이 식인자는 자신의 죽음을 더 상세하고 치밀하게 상상한다. 그런 점에서 설리는 아마 목을 매려고 했던 것 아닐까? 나름의 목표를 달성한 뒤 자신이 먹어 치운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것으로 자신을 죽이는 방식으로. 리가 카일라의 독립과 매런의 안전을 확인한 뒤 죽음을 택했던 것처럼. 리는 역겨운 사람들을 역겨운 방식으로 없앴으니, 자신도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죽기를 바랐던 것처럼. 식인자에게 죽음은 ‘먹는다’는 행위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 네이버 영화 / 영화 속에서는 설리 서사가 많이 풀리지 않아서 그냥 미친 싸이코 할아버지로 나온다...




메런과 리의 결말

영화와 책은 메런이 리를 먹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설리의 피로 엉망진창이 된 방에서 리는 폐에 칼이 찔려 힘겹게 숨을 몰아쉰다. 매런은 현실 감각을 완전히 잃은 공황 상태다. 그런 매런에게 리는 애원하듯 자신을 먹어달라고 말한다. 설리의 피와 리의 피가 뒤섞어 엉망인 채로 매런은 리를 먹는다. 영화에서 리의 대사는 “먹어줘”가 아닌 “죽여줘”에 가깝다. 단지 자신을 죽이는 방식이 먹히는 것일 뿐이다. 뼈까지 전부 완전히 사라지는 죽음. 영화에서 리는 무거운 몸에서 벗어나 완전히 사라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육체가 남아 영혼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없던 것이 되어버리는 죽음을 원하는 것 같았다.


책에서는 정반대의 분위기다. 소설 속 매런은 술에 취해 기분 좋은 상태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좋은 꿈을 꿀 것 같은 예감이다. 마치 자신이 먹어 치운 사람들처럼 앞으로 무엇을 잃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리는 양치를 하고 청바지를 벗고 잘 잡힌 근육의 몸으로 매런의 곁에 눕는다. 그리고 이제껏 듣지 못했던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아무런 긴장도 공포도 없이. 책을 읽으며 내가 상상한 리의 마지막 독백은 가뿐한 느낌이었다.


‘이제 카일라는 자유롭게 어디든 언제든 집을 떠날 수 있고, 너는 아빠를 만났고, 설리로부터 안전해. 그러니 이제는 네가 날 향한 허기를 느끼지 않도록 너에게 쌀쌀맞게 굴 필요가 없어. 이제 나는 기꺼이 너에게 먹힐 수 있어. 너를 통해 나는 자유로워지는 거야.

사실 책에서 실제로 리가 한 말은 짧은 몇 마디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시니컬한 리의 마지막 말에 펑펑 울어버렸다. “난 우리가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았어.”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 걸, 네가 날 먹을 거라는 걸, 그러니까 내가 널 좋아하게 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어. 잔인할 정도로 로맨틱한 고백이다.

지금껏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먹었지만, 처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먹은 매런. 그리고 그 사람이 기꺼이 자신을 먹어도 좋다고 자신을 내놓았다. 매런은 리를 먹음으로써 어떤 금기나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리가 사라졌다는 건 이제 괜찮을 수 없다는 것과 동시에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 매런은 이제 먹는 것도 누군가에게 먹히는 것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리가 그렇게 만들어줬다. 엄마, 아빠, 설리, 먹은 사람의 책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었던 위안과 위로, 삶의 의지를 오로지 리만이 주었다. 잿빛 아침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카우보이모자를 봤을 때 엄마가 떠났을 때와 같은 기분이지 않았을까. 함께 있으면 다 괜찮아질 것 같은 감각을 영원히 잃어버린 기분. 이제는 엄마도 리도 없다. 남은 생에서 다시는 그런 안도감 따윈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의 모든 것이 남김없이, bones and all이 다 매런의 일부가 되었고, 리의 목소리는 위기의 순간 귓전에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처럼 더 오래 맴돌 것이 분명하다. 이제 매런 안에 깊이 새겨진 리는 매런이 누군가를 먹으려 할 때마다 이렇게 얘기해 줄 것이다.


ⓒ 네이버 영화


“괜찮아, 매런. 네가 역겹다고 느끼는 사람, 네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먹어도 돼. 내가 역겨운 사람들을 먹어치웠던 것처럼 말이야. 네가 이렇게 경고했는데도 못 알아듣다니. 멍청한 건 그 자식이라고. 네가 그 냄새에 끌리는 게 고약한 게 아니라 네가 그들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거야. 네가 그들을 유혹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너를 유혹하는 거지. 매런 너는 사람을 먹는 나를 역겹게 생각하지 않았어. 정의롭다고까지 얘기해 줬지. 물론 나 스스로 그 행위가 정의롭다고 생각한 건 설리를 먹었던 마지막 식인 뿐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그럼에도 넌 나를 기꺼이 먹어줬어. 넌 끝까지 거부하고 싶었겠지만 사실 내가 먹히고 싶었거든. 내 삶은 너무 역겨웠으니까. 삶이 원래 그렇잖아. 우린 인생의 역겨운 냄새를 더 잘 맡을 뿐이야. 그들은 나와 달리 의식하지 못했을 뿐 자기의 삶이 시시하고 역겹다는 걸 알고 너에게 끌리는 거니까. 내가 너를 처음 봤을 때 그랬듯이. 너와 사랑에 빠지는 건 곧 죽음과 사랑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넌 사랑스러워.”




영화와 책


영화 속 티모시는 내가 그리던 리의 모습 그 자체였지만 내가 보고 싶은 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선명하게 간직하고 싶은 장면은 마지막 순간 스쳐 지나간 리의 표정이었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매런이 리를 먹는 장면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매런이 자신을 먹는 동안 리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언제까지 의식이 있었을까? 매런이 자신의 무엇을 먹는 것까지 볼 수 있었을까? 앤디를 먹을 때와는 조금은 다르길 바랐을까? 자신이 먹었던 사람들을 떠올렸을까? 아침에 깨어난 매런을 안쓰러워했을까? 레이철과 카일라와의 추억을 상상했을까? 난 리가 자신을 먹는 매런을 고요하게 바라보는 장면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 장면이 아무리 길고 상세하고 잔인해도 그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표정이 궁금했다. 책처럼 고요한 장면은 아니었지만 리가 지은 찰나의 표정만은 비슷했던 것 같다.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 네이버 영화


나는 두 사람이 사랑보다 허기와 본능에 굴복함으로써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다. 사랑하지만 먹힘으로써 자유로워지는 걸 택한 리. 사랑하지만 먹음으로써 자유로워지기를 선택한 매런. 두 사람은 그저 각자의 여정을 끝냈을 뿐이다. 소설에서 매런의 가장 평범한 일상이 그 뒤에 이어지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라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대사처럼 내일의 태양은 뜨고 매런은 살아간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다음 날의 태양은 영원히 떠오르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책은 인간의 사랑보다는 본능, 이해보다는 고독에 초점을 맞췄다. 영화는 그 반대에 중점을 두었다. 그 두 가지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라면 이 책과 영화도 함께 존재하는 편이 더 나은 것 같다. 결국 두 작품 모두 먹고, 먹히고, 사랑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끌리는 쪽이 로드무비의 장렬한 피날레보다는 평범한 일상 속 고독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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