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8일 / 수요일 / 날씨: 봄일랑말랑
사무실 하나 차지한
손해사정사는
자격증 하나 없지만
조금의 손해도
털끝 하나 용납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화초를 닦거나
느긋하게 낮잠이나 자다가
문을 두드리면
그 즉시 자세를 고쳐 앉고
안경을 추켜올리고
날카롭게 깎은 연필로
계산을 시작한다.
10원, 10g, 10cm까지
집요하게 파고들며
청구서를 작성한다.
손해를 초래한
바보 같은 결정들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매섭게 몰아붙인다.
나는
그 청구서를 들고
잔뜩 풀이 죽은 채로
맞은편 사무실로 찾아간다.
사무실 하나 차지한
작가는
대표작 하나 없지만
문장 속 어색한
단어 하나 용납하지 않는다.
소명은 작가의 몫이다.
끝내지 못한 문장들이
휘갈겨진 습작 종이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책상에서
반듯한 자세로
소명서를 써 내려간다.
변명이든, 반성이든, 성찰이든.
비유와 상징과
기타 등등을 섞어
유려하게 문장을 만들어낸다.
나는
그 소명서를 읽고
다시 미소를 되찾는다.
꾸벅 인사를 한다.
"이제, 그 청구서는 태워주세요."
손해사정사와 작가는
뒷골목에서
청구서를 태우며
연초를 피우면서
불평을 시작한다.
피곤한 성격이라며
대범하지 못한 성격이라며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일까지 해야겠냐고
모든 일을 이런 식으로
쓰지 않고서는 괜찮아지지 않는
소심한 놈은 성공하긴 글렀다며 혀를 끌끌 찬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어.
건물주인데, 찾아오면 해줘야지.
종이와 담배가
모두 타고나면
침을 퉤 뱉고는
익숙한 한탄으로
대화를 끝낸다.
손해사정사는 낮잠을 자러,
작가는 문장을 고치러 돌아간다.
그렇다.
나는 건물주이고,
두 사람을 쫓아낼 생각이 없고,
그들도 딱히 나갈 생각이 없다.
그래서 당분간은
이 기묘한 갑을관계의
장기 임대가 이어질 모양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