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의 연애방정식-9

제9화. 사라진 파트너와 85도의 증거

by 지그프리드

○ 시놉시스: "칼 대신 서류를 든 셰프"

동생 연호가 입사 직전 거액의 사기를 당해 잠적하자, 연우는 동생의 빚을 갚고 그가 돌아올 자리를 만들기 위해 호텔 셰프 자리를 포기합니다.

남장을 하고 성운그룹 전략기획팀에 입사한 그녀.

하지만 하필 그녀의 상사인 태준은 매일 점심 메뉴의 염도까지 체크하는 까다로운 미식가입니다.

사고 친동생을 대신하기 위한 여주인공의 고군분투기입니다.


○ 등장인물

- 한연우(26세) : 촉망받던 천재 수 셰프(Sous Chef). 5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최연소 타이틀을 거머쥐기 직전이었으나, 사라진 남동생 연호의 사고를 수습하고 그의 커리어를 지키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사직서를 던집니다. 칼을 잡던 손으로 이제는 볼펜을 잡고 성운그룹 신입사원으로 잠입합니다.

- 강태준(32세) : 성운그룹 본부장이자, 미식가들 사이에서 '악마의 혀'라 불리는 완벽주의자. 정체를 숨긴 재벌 3세로, 스트레스를 요리로 푸는 비밀스러운 취미가 있습니다.

- 한연오(26세) : 한연우의 쌍둥이 남동생, 어릴 때부터 사고를 치고 다닌 사고뭉치입니다.

- 강승준(32세) : 태준의 형. 태준이 능력을 인정받는 것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제9화. 사라진 파트너와 85도의 증거


태준이 연우의 손을 잡고 "어디서 본 적 없냐"며 추궁하던 찰나,

파티장의 조명이 꺼지고 신규 호텔의 메인 영상이 상영되기 시작했다.

주변이 어두워진 틈을 타 연우는 승준의 도움으로 간신히 태준의 손을 뿌리치고 연회장 뒤편으로 도망쳤다.

태준은 인파를 헤치며 그녀를 쫓았지만, 연우는 이미 준비된 비상구를 통해 주방 쪽으로 몸을 숨긴 뒤였다.

태준이 주방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곳에는 방금까지 사람이 있었던 듯한 흔적만 남아 있었다.


연우는 도망치기 직전,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입안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주방 한편에 있던 종이컵에 급히 커피를 한 잔 타서 마셨다.

그리고 태준의 발소리가 들리자 컵을 내려놓고 창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태준은 텅 빈 주방에서 주위를 살피다, 조리대 위에 놓인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컵 하나를 발견했다.

1. 시각적 단서: 종이컵 가장자리에는 연우가 바른 붉은색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2. 후각적 단서: 컵을 가까이 가져가자, 태준이 매일 오후 3시 본부장실에서 맡던 바로 그 향기—시나몬 파우더와 소금 한 꼬집, 그리고 귤껍질의 상큼함이 섞인 완벽한 향이 올라왔다.


태준은 립스틱 자국이 남은 그 컵을 들고 얼어붙었다.


'이건... 한연호가 나를 위해 타주던 그 커피 레시피야.'


태준은 아직 따뜻한 컵을 쥐고 중얼거렸다


"한연호가 여자였어? 아니면... 그 여자가 한연호의 레시피를 알고 있는 건가?"


태준은 그 컵을 버리지 못하고 소중하게 챙겼다.

그리고 파티장 밖으로 뛰어나가지만, 이미 연우는 승준이 미리 준비해 둔 차를 타고 사라진 후였다.


다음 날 아침, 태준은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본부장실에 앉아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어젯밤 파티장에서 가져온, 붉은 립스틱 자국이 선명한 종이컵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평소처럼 남장을 한 '신입사원 한연호'가 들어왔다.


"본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커피 가져왔습니다."


연우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커피를 내려놓지만, 태준의 시선은 연우의 입술에 머물렀다.

어젯밤 드레스를 입고 붉은 립스틱을 발랐던 그 입술의 실루엣이 겹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연우가 긴장한 기색으로 본부장실을 나가자, 태준은 곧바로 인사팀에 연락해 한연호의 인사기록 카드를 다시 요청했다.

서류를 훑어내려가던 태준의 손가락이 '가족 사항'란에서 멈췄다.


[관계: 누나 / 성함: 한연우]


태준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어젯밤 파티장에서 그녀가 수줍게 뱉었던 그 이름. '연우'. 단순히 흔한 이름이라 치부하기엔, 그녀의 손에 박힌 굳은살과 그 기막힌 커피 레시피가 모든 퍼즐 조각을 하나로 맞추고 있었다.

태준은 연우를 다시 불러들였다.


"한연호 씨. 자네 누나 이름이 한연우더군."


태준의 서늘한 질문에 연우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희 누나 이름은 왜..."

"어젯밤 승준 형 곁에 있던 여자 이름도 한연우였거든. 자네랑 아주 많이 닮았고, 자네가 타주는 커피와 똑같은 맛을 내는 여자. 정말 자네는 모르는 일인가?"

"본부장님, 그건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저희 누나는 지금 지방에 내려가 있어서 파티 같은 곳에 갈 상황이 아닙니다. 아마 동명이인이거나 본부장님이 착각하신 걸 겁니다."


연우는 한사코 부인하며 태준의 시선을 피했다.

태준은 눈앞의 신입사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떨리는 목소리와 미세하게 흔들리는 어깨. 확증은 없었지만, 심증은 이미 100%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며칠 뒤 주말, 승준은 다시 한번 연우를 불러냈다.

이번에는 더 화려한 선상 파티였다.


"연우 씨, 지난번 파티에서 반응이 너무 좋았어! 이번엔 정식으로 투자자들에게 메뉴 기획자로 인사시켜 줄게. 아, 태준이 걱정은 마. 녀석은 주말엔 집에서 서류만 보는 워커홀릭이라 절대 이런 데 안 오니까."


연우는 불안했지만, 승준의 끈질긴 설득과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다시 한번 드레스를 입었다.

긴 생머리 가발에 우아한 실크 드레스를 입은 연우는 이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조차 낯설 만큼 완벽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 시각, 집에서 휴식을 취하던 태준은 답답한 마음에 연우(연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월요일 회의 자료를 핑계 삼아 그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우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전화도 안 받고... 대체 주말에 뭘 하길래."


초조해진 태준은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승준이 주말마다 연다던 선상 파티를 떠올렸다.

평소라면 질색했을 자리였지만, 오늘따라 형의 유들유들한 농담이라도 들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태준은 예고도 없이 파티장에 나타났다.

샴페인 잔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유영하던 태준의 레이더에, 멀리 선상 난간에 기대어 있는 익숙한 뒷모습이 포착되었다.


연우는 바닷바람을 쐬며 잠시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심장을 얼려버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말에 바쁘다더니, 여기서 형 파트너 노릇 하느라 바빴던 건가? 한연호 씨... 아니, 한연우 씨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놀란 연우가 돌아보자, 그곳에는 분노와 확신이 뒤섞인 눈빛의 태준이 서 있었다.

도망갈 곳 없는 선상 위,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연우와 슈트 차림의 태준 사이에 불꽃 튀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태준은 연우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제 대답해 봐. 내 앞에서 안경 쓰고 넥타이 매고 있던 그 신입사원은 어디 가고, 왜 이 아름다운 여자가 내 앞에 서 있는지."


태준의 시선은 이제 의심을 넘어, 정체를 숨긴 그녀를 향한 알 수 없는 열망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태준에게 손목을 잡힌 연우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도망칠 곳 없는 바다 위, 태준의 눈빛은 흔들리는 파도보다 더 거칠게 일렁이고 있었다.


"본부장님, 그게 아니라... 제가 설명할게요..."

"설명? 아니, 설명은 필요 없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까."


태준은 연우를 끌다시피 하여 인적이 드문 선상 데크 구석으로 데려갔다.

화려한 음악 소리가 멀어지고 차가운 바닷바람 소리만 들리는 곳, 태준은 연우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한연호로 살 때는 그렇게 털털하더니, 한연우로 나타날 때는 왜 이렇게 예쁜 거지?"


태준의 목소리는 분노인지, 아니면 배신감인지 모를 감정으로 떨리고 있었다.


"말해봐. 나를 속이고 내 곁에서 커피를 타고, 내 걱정을 하고, 내 재킷을 빌려 입던 그 모든 순간이 다 연기였나? 내 눈을 피하며 화상 흉터라고 거짓말할 때, 속으로 비웃었어?"

"아니에요! 절대 비웃지 않았어요. 본부장님, 그건..."


연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정체가 들통났다는 공포보다, 태준의 진심 어린 배려를 기만했다는 죄책감이 그녀를 더 아프게 찔렀다.

태준은 연우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며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럼 왜 그랬어? 왜 남자인 척 내 인생에 들어와서 나를 미치게 만드냐고! 내가 남자 직원을 상대로 정체성 혼란까지 겪으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태준이 연우를 거세게 추궁하던 그때, 어둠 속에서 승준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평소의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태준의 어깨를 잡았다.


"태준아, 거기까지만 해. 연우 씨 울잖아."

"형... 형은 알고 있었지? 처음부터 다 알고 나를 구경한 거야?"


태준의 불화살이 승준에게 향했다.

승준은 한숨을 내쉬며 연우를 자신의 뒤로 숨기듯 세웠다.


"그래, 나도 중간에 알았어. 하지만 연우 씨가 나쁜 의도로 그런 게 아냐.

사라진 남동생을 찾을 때까지만 직장을 지켜야 했대. 내가 파티에 파트너로 서달라고 한 것도, 태준이 네가 아니라 투자자들에게 메뉴 기획자로서 실력을 보여줄 기회를 주려던 내 욕심이었어."


승준이 연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보호하려 하자, 태준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정체에 대한 충격보다, 지금 자신의 형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는 '질투'로 다가왔다.


"손 떼. 내 직원이야."

"직원? 방금은 한연우라며. 태준아, 넌 지금 이 친구가 남장 여자라서 화가 난 거야, 아니면 내 곁에 있는 게 화가 난 거야?"


승준의 뼈 있는 질문에 태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연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리고는 승준의 손을 거칠게 쳐내고 연우의 손을 다시 낚아챘다.


"형이 상관할 바 아냐. 이 여자가 내 직원이든, 사기꾼이든, 그 처분은 내가 해."


태준은 연우를 데리고 선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승준은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인정했네, 강태준.'


닫힌 선실 문 너머로 태준이 연우를 가두듯 세웠다.

연우는 화려한 가발과 드레스 차림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태준은 한참 동안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한연호는 죽었어. 내일부터 내 앞엔 한연우로 나타나. 네가 왜 그랬는지, 동생이 어디 갔는지... 밤을 새워서라도 다 들어줄 테니까."


태준의 낮은 목소리가 연우의 귓가를 울렸다.

드디어 가면이 벗겨진 밤, 두 사람의 진짜 로맨스가 바다 한가운데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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