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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변의 잡설 Nov 24. 2021

연평도 포격도발 11주기를 맞아..


연평도 포격도발 사건이 발생한지 벌써 11년이 되었다.


전쟁을 준비하지만, 동시에 전쟁을 반세기 동안 겪어보지 않은 조직에서 짧은 기간 생활을 하면서 전쟁의 두려움을 느꼈던 적이 딱 두 번 있다. 한 번이 천안함, 다른 한 번은 연평도 포격 때였다. 


간식사려고 피엑스 갔더니 텔레비전 뉴스속보로 불타는 연평도를 보았을 때의 그 황당함이란... 당시 그 상황이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때 난 육군 전체로 보면 말단의 힘없는 아무개에 불과했지만, 내가 느끼는 공포감은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태어나서 그런 아찔함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조지 오웰을 정말 존경한다. 그는 군에 자원입대하여 글을 썼다.)


모든 외출, 휴가가 일제히 통제되었고, 병사들은 조를 나누어 각 경계근무를 섰으며, 단독군장을 갖춘 채 잠을 잤다. 다들 '설마..'하며 욕하고 웃기도 했지만, 한켠에는 늘 불안감이 있었던 것 같다. '연평도를 쳤으니 그 다음은 본격적으로 중부전선을 치고 내려올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부대가 있는) 포천도 무사할 수 없다'는 식의 예상을 해가면서 미국의 항공모함 조지워싱턴 호가 한반도로 접근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야 수화기를 통해 바깥의 모습을 접할 수 있었다. 또다른 충격이었다. 바깥의 모습은 내가 있엇던 부대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걱정하며 전화를 건 내게 친구들은 오히려 '무슨 일이냐'고 반문했다. 동시에 내 예상도 제대로 빗나갔다. 나는 왜 사회인들도 사시나무 마냥 떨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전역 후 대북제재, 미사일 발사 등과 같은 북한 관련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부대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공포감에 떨고 있을지 상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군을 생각하는 마음은 점점 희미해졌고, 전역한지 10년이 지난 지금 군대는 왠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만 같다. 


북한의 도발이 일어날 때마다 "요즘 전쟁날까봐 무서워서 잠도 안온다"고 말하는 어르신들이 있다. 전쟁을 직접 겪어본 이들만이 느끼는 공포일 것이다. 

전쟁의 무서움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사회는 몹시 평화로워서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문득 박완서 선생님의 글 - 이 역시도 군에서 읽은 것이지만 - 이 떠올라서 검색을 해보니, 마침 어느 누군가가 고맙게도 일부분을 올려주어서 퍼온다. 중략된 부분이 많긴 하지만 전쟁통에 장삼이사들이 느끼는 혼란을 몹시도 잘 묘사해주신 글.


사회에서의 하루하루는 늘 전쟁같지만, 이런 순간조차 11년 전 그날,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불침번을 서고 있을 이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고 다짐해본다. 

지금 특공여단에서 복무 중인 친한 동생이 아무쪼록 지루한 군생활을 했으면 좋겠다.



***

http://blog.naver.com/fahrenheitz?Redirect=Log&logNo=40180713352


"우리가 신나게 피난 짐을 싸는 사이에 오빠는 전쟁전에 근무하던 학교에 볼일보러 갔다가 거기 주둔한 군부대에서 일어난 오발사건으로 양쪽 다리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다. 학교 건물에 잠시 주둔했던 군대는 부상자를 근처 병원에 입원시켜 응급조치를 받게 하고 남쪽으로 철수했다.

그때 우리식구는 오빠내외와 조카둘과 엄마와 나, 여섯식구였다. 엄마와 올케는 아기를 업고, 오빠와 내가 이부자리 양식 등 피난 보따리를 지던지 메던지, 운수좋으면 손수레라도 하나 장만해 둘이서 끌고 밀던지 하려던 그럴듯한 피난행렬의 구도는 수습할 수도 없이 산산조각이 났다.

 

군에서 오빠를 입원시킨 병원은 구파발 국도 변에 있었다. 지금도 1.4후퇴라고 불리는 마지막 후퇴령이 떨어진 날 시골 의사도 우리를 버리고 떠났다.

군에서는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피난을 촉구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가다 죽더라도 피난을 안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오빠는 우리 집안에서 제일 큰 짐, 나의 족쇄가 되었다. 바퀴없이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짐이었다. 바퀴나 지게로 식구를 나르는 사람보다도 단신으로 걸어서 가는 피난민이 더 부러웠다. 나도 오빠만 없다면, 우리 식구만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저렇게 훨훨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우리도 어찌어찌해서 바퀴달린 손수레를 하나 구할 수 있었다. 오빠를 태우고 나는 죽을힘을 다해 사투를 벌였지만 짧은 겨울해가 저물 무렵 겨우 무악재 고개를 넘고 나서 부실한 손수레는 바퀴가 빠지면서 내려앉았다.

손수레 바퀴가 장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빠져 달아나면서 오빠가 천근의 무게로 땅바닥에 내려앉자, 내머리에 전광석화처럼 떠오른 생각은 차라리 잘됐다, 나 혼자만이라도 이 재수 더럽게 없는 가족으로부터 벗어나자, 하는 생각이었다. 나 혼자라면 얼마든지 그날 안에 한강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나에 대한 식구들의 철석같은 믿음은 나에게 차마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중략

 

어쩜 그렇게 혹독한 추위 그렇게 무자비한 전쟁이 다 있었을까. 이념이라면 넌더리가 난다. 좌도 싫고 우도 싫다. 진보도 보수도 안믿는다. 김훈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아무편도 아니다. 다만 바퀴없는 자들의 편이다"

[출처]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작성자 w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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