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강사의 어린 시절을 들으면서
어려운 환경에서 세상이나 환경을 탓하기보다 스스로에게 주어진 어떤 새로운 소명(?)이 있는 게 아닐까(까지는 사실 아닌데) 생각이 들었던 때는 대학 입학하고 처음이었습니다. 서울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부와 일찍 담을 쌓고 문제아 전력을 쌓았던 저로서는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자퇴 위험이 여러 번 있었어서 대학을 입학한 게 스스로도 기적 같았죠.
대학을 입학하고 굉장히 놀란 것은 제가 너무 가난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입학식을 명동성당에서 했는데, 당시 저는 집에 자동차가 없었고 대학 동기가 <어디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냐> 물어볼 때서야 차가 없다는 게 부끄러운 거라는 걸 깨달았죠. 아마 그때 제가 얼버무리고 말았을 겁니다. 당시 나름 어렸던 제가 <우리 집은 차도 없고 가난해> 이렇게 바로 인정하고 말하기는 너무 자존심이 상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와 남을 속이는 게 더 쉬웠던 거죠.
제가 스스로를 그렇게 가난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은 제가 어울렸던 친구들의 영향이 컸습니다. 친구들 중에는 아파트에도 살면서 나름 부유한 애들도 있었지만, 아픈 할머니와 병든 아버지 밑에서 아마도 지금이면 기초수급자였을 생활을 하는 어려운 친구들이나 양친 부모 중 한 명은 없는 힘든 친구들도 꽤 있었거든요. 여기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심지어 자식을 술집에 팔아먹는, 가난한 건 죄까지는 아니지만 부모로서의 역할 자체를 포기한, 끔찍한 부모들도 상당해서, 양친 부모가 살아있는 제 사정이 낫구나 했던 거죠.
대학은 그러나 상당히 달랐습니다. 부유할 뿐만 아니라 가족 간에 우애도 깊고 자상하고 따뜻한 가정이 많았죠. 저는 그런 집안은 드라마에서나 있는 줄 알았는데, 실제 그런 가정들이 상당히 많았던 건 충격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스포츠카를 사주고 그 딸은 동기들을 매번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줬으며, 또 다른 동기는 아버지가 학교까지 차를 몰고 와서 밖에서 같이 가락국수를 먹고 들어갈 거라며 행복하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난 자체가 불행하고 부끄러웠다기보다는 가난으로 인해 수반되는 여러 갈등 상황들이 부끄럽고 힘들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가난하지만 그걸 딛고 성공한 분들에게는 진심으로 그 노력이 대단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렇다고 가난이 반대로 좋은 기회였다는 말을 하는 것은 저로서는 무리 같습니다. 왜냐하면 가난 그 자체와 제가 생각하는 성공은 딱히 연관되는 게 없다는 게 제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난으로 인해 파생되는 상황들과 불필요한 감정들 그리고 마지 못 해 서둘러 내려야만 했던 결정들이 예상치 못 한 상황으로 이끌어 갔던 게 세상을 새롭게 보게 했을 뿐, 가난 그 자체로서 얻어진 교훈은 딱히 없었기 때문이죠. 오히려 가난했던 친구들 중에는 앞서 말했듯 너무 끔찍한 부모들이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로 인해 행복에 대한 기준이 낮아지며 생각보다 불행해진 친구들을 더 많이 봤다고 하는 게 제 솔직한 심정이겠죠. 가난 그 자체보다 가난으로 도출되는 상황들을 막을 수가 없는 탓이 크기 때문이죠.
따라서 저는 가난했지만 딛고 일어서서 단지 부자가 된 사람에게는 그다지 큰 가치를 두지 않고 (가난 자체를 극복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보지 않는 이유는 부유해도 불행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과 오히려 가난으로 인해 부유함에 집착할 수 있기 때문임을 알고 있어서) 불행하지만 딛고 일어서서 가치를 만든 사람을 인정합니다. 가난하고 불행했는데도 부유하고 가치까지 만들려는 사람을 본다면 아마도 제가 믿고 따르게 되지 싶습니다만, 아직까지는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저는 지금도 제 차가 없고 앞으로도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자동차를 구매할 생각은 없습니다. (북한 김정은 때문에 돈 벌어서 2억 넘는 차를 보란 듯이 사주마 생각할 때가 있긴 하지만) 어려서는 차가 없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갖춰야 할 소양을 갖추지 않은 것 같은 조바심과 부끄러움이 있었지만, 지금은 제 스스로 판단해서, (가난하다는 조건에 떠밀려하는 결정이 아닌) 필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