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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진 May 01. 2024

현대사회에서 실패는 온전히 개인의 몫이 됐죠

집단 목표의 상실이 주는 개인 실패의 극대화가 부르는 우울

https://youtu.be/M73rk-kCZ18? si=_h72 JbrjBTz7 Upgt


과거 수렵 시대에는 가령 인류의 목표가 같았죠. 좋은 날씨를 기원했고 건강한 과일과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사냥감, 안전한 주거를 원했을 겁니다. 나의 아이가 건강하기를 바랐을 것이고 나의 가족이 사냥을 나가서 다치지 않기를 바랐을 겁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의 아이만 죽거나 나의 가족만 다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겠지만, 궁극적으로 거대한 자연에 맞서 같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자는 공통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다른 사람이 공감할 수 없는 나에게만 발생하는 실패>라는 개념이 다소 약했다고 봐야죠. 사냥에 나가서 목표로 한 사냥감을 잡지 못하면 그건 그 집단 전체의 실패가 되고 그 집단 전체가 굶는 결과로 이어지는 거지, 나 혼자만의 실패는 아니니까 말이죠. 


그런데 현대에 오면서부터는 인류의 목표가 개체화되고 다각화됐습니다. 즉 누군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결혼을 하고자 하고 누군가는 대학원까지 가서 교수가 되고자 하며 누군가는 유명인이 되고자 하는데, 이 과정에서 각자 겪는 실패라는 개념이 발생하게 됩니다. 궁극적으로야 인간이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목표는 여전히 동일하게 갖고 있지만 이를 추구하는 데 있어 세부적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세분화됐고 따라서 각자 감내해야 하는 실패의 정도가 다 달라진 거죠. 대학 입시에서 실패를 경험하는 사람, 대학원 입시에서 실패를 경험하는 사람, 회사 승진에서 실패를 경험하는 사람, 결혼에서 실패를 경험하는 사람, 등등 궁극에는 같은 목표를 향한 실패의 과정이겠으나 일정 부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실패>라는 게 생긴 겁니다. 


집단이 사냥에 실패해도 분명 누군가의 잘못이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의 지도가 있었을 것입니다만 결국 사냥의 실패는 집단 전체의 손해로 이어지기 때문에 혼자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상대적으로 덜한 거죠. 지금은 내가 대학 입시에 실패한 대가로 다른 사람이 그 대학에 들어가고, 내가 교수가 되지 못하면 그 자리를 다른 사람이 얻을 뿐만 아니라, 내가 인기를 잃으면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대체하기 때문에, 나의 실패는 오로지 나 자신의 실패일 뿐 집단의 실패가 아니고, 따라서 <나 혼자 잃거나 실패하는 과정을 감내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이 얻는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데 따른 고독>이 존재하게 된 점이 우울이 점점 극단으로 인류를 괴롭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당연히 내가 실패했다고 해서 남도 실패하기를 바라고 내가 떨어졌다고 해서 남도 떨어지기를 바라면 안 되는 거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한 박탈감까지 갖지 않는 자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저 사람이 되는 게 나는 왜 안되는가>, 처음에야 남 탓을 하기가 쉽겠지만 이게 반복되면 자책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가 어렵고 결국 자살이나 자해와 같은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축구 경기를 보면 대표적으로 축구 선수들이 졌을 때 축구 선수를 지지하는 집단 전체 (심지어 국가 전체)가 진 것과 같은 낭패감을 보이는데요. 이런 실패의 경우 실패한 선수들이 감당하기 힘든 결과로 고통받기도 하지만, 집단 실패의 경험은 또 한편으로 진한 카타르시스를 줍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과 실패로부터 유도되는 강한 집단 유대감이 주는 엄청난 카타르시스죠. 서로 얼싸안고 울고 불고 고함지르고 진짜 난리가 아니죠. 이걸 보면 인류가 오랫동안 실패에 대해서도 강한 유대감으로 살아남아왔음을 알 수가 있고, 현대에서 이게 개체 수준으로 내려간 것이 아마도 우울의 원인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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