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면 악플이 없을 거라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악플이 염려되어 댓글 창을 닫을 정도로 위기감을 느끼는 방송을 하는 게 나을지는 모르겠는데, 직접 댓글을 달을 수가 없다 보니, 여기저기 의견을 쓰곤 합니다.
저도 초등학교 1학년 때로 기억을 하는데 강박 증세가 있었는지, 무릎까지 오는 스타킹을 신고 학교를 가던 중, 스타킹 길이가 조금만 무릎 아래로 내려가도 걸음을 걷지 못하고 매번 똑같은 길이로 맞추다 보니, 학교를 1시간 이상 지각한 기억이 있습니다. 진짜 양쪽 길이가 조금만 달라져도 걸음을 <전혀> 걸을 수가 없었어요. 지각을 하고 나서 선생님에게 스타킹에 대해서 이상한 말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고, 선생님은 듣고 담담하게 자리에 앉으라고 했었죠. 다행히 지각으로 혼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초등학교 때는 다들 올 백 맞기도 하고 그러니까 저도 그런 학생이었고요.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이렇게 누구나 작든 크든 나름의 강박이 있는 게 성장 과정의 특이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모친의 혈액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양을 채우는 단계에서, 태어나면 모유부터 시작해 유아식을 하고, 핥고 씹고 삼키고 하는 단계를 거칩니다. 처음에는 흡입만 하면 되는 식으로 공복감을 채우지만, 점차 턱과 이빨, 기타 신체 기관을 이용하여 음식을 적극적으로 소화하는 과정을 배우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은 자라는 동안 내내 바로 이전에 힘들게 습득한 기술을 빠른 속도로 다른 기술로 대체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이 과정은 사춘기까지 급속도로 이어지고요.
핥는 방법에 가까스로 적응하면, 바로 씹어야 하고, 이 단계를 넘어서면 바로 깨물어 삼켜야 합니다. 매번 새로운 맛도 받아들여야 하죠. 즉 핥는 게 편하다고 해서 계속 핥아먹을 수 없기 때문에 유아는 씹는 과정을 거쳐야 하나, 이 경험이 늘 유쾌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쉬운 단계에서 어려운 단계로의 압박이 계속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폐로 의심받던 어떤 남아의 경우, 엘리베이터 앞에서 "가운데로, 가운데로"를 외치는데, 이는 해당 남아가 사고를 프레임 속에서 하기 때문에 나오는 발상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지금 바로 앞에 보는 세상을 3차원의 다면적 공간으로 인지하고 각각의 명칭을 부여해 이해하지만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로 와"처럼) 해당 아동은 바로 앞에 보이는 세상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인식하여 그 프레임 속 가운데가 안전하다고 판단을 하고 "가운데로 가운데로"라는 <이상한> 말을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놀이방에서 바람 빠진 공만을 주워 담은 것 또한 본인이 인지하는 세계 (프레임)에서는 공은 원형이고 이는 안전함을 의미하는데 그렇지 못 함으로 인하여 불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 아이들은 전자적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세계에 익숙한 편인데, 전자적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세계에서의 원은 언제나 완전한 원의 형태를 보이게 되고 (애플의 로고는 늘 같은 것처럼) 그 외의 불완전한 형태는 받아들이기 여러 울 수 있습니다. 이런 아동이 만약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교육을 받았다면 부모에게 똑같은 모양의 잎사귀를 가져와 모아서 보여주는 등의 이상 행동을 했을 확률이 높은 거죠. 일부 동물들이 주인에게 늘 같은 소위 말하는 쓰레기를 모아서 선물처럼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특정 형태를 모으는 등의 강박은 심지어 동물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처음 인공지능을 선보일 때 사과의 모양 하나를 인지시키는 것도 힘들었던 이유는 실제 삶에서의 사과는 대단히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컴퓨터가 인지하기 힘들어했던 것에 있으며, 마찬가지로 이 아동도 세상에는 다양한 "가운데"가 있고 "사과"가 있고 "원"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본인이 만든 사고 과정이 워낙에 강력하다 보니, 그 관념을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발생하는 거죠. 즉 핥기까지는 아주 잘했지만 씹는 것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상황인 겁니다. 단순 소화 과정이면 치과에 가서 치아 교정을 하면 되겠는데, 뇌의 성장 과정에서 발생하다 보니, 이런 이해 못 할 해프닝이 벌어지는 거고요.
매번 통하지는 않겠지만 부모가 할 수 있는 그나마 쉬운 방법으로는 아이가 "가운데로"와 같은 프레임적 사고를 보일 때, 부모가 당황하거나 불안해하는 대신, "저것도 가운데일 수 있을까?"와 같이 물어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굳이 바람 빠진 공만을 모아 올 때 멀쩡한 공을 찌푸리면서 "이것도 과연 바람 빠진 공이니?"와 같이 계속 사고를 확장시켜 본인 프레임을 지키면서도 다른 사고를 받아들이게 교육을 하는 방법이 필요해 보입니다. 답변이 늦어지면 기다려야죠. 본인 사고 안에서 회로를 만드는 거니까요.
간혹 자폐적 성향이 강한 아동은 다른 사람과의 감정적 교류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고 따라서 부모와의 애착 형성에서도 큰 스트레스를 안 받고 있는데, 이 부분을 강요해서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면 본인이 반대로 무능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본인 사고가 발전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개선됩니다. 찌그러진 공이 불완전하다는 것에 집착하는 아이에게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나누고 알리라고 하는 것은 인과가 약하죠. 찌그러진 공이 똑바른 공도 되고, 똑바른 공이 찌그러진 공도 되는 그 원리가 해당 남아에게는 더 신기한 일이니까요. 즉 강을 건널 때 엄마는 빨리 건너자고 난리 치는데 아이는 그 안에 물고기를 바라보는 그런 경우와도 가령 흡사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런 물리 세계에 대한 인식 문제는 주로 남아에게서 발견되는 경향이 높은 거 같습니다. 사실 공간에 대해 인간이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그 공간을 규정하고 프레임으로 나누는 과정은 인간 발전 과정에서 필요한 능력이었고, 일부 이 능력이 다른 능력을 압도하는 경우들도 있는 듯합니다. 이런 특성을 세상을 읽는 독자적인 프레임으로 성공시킨 경우에도 (아닌 경우 학습에서 어려움이 일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사회생활에서는 대단히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습니다. 나중에 성공하고서도 말더듬이나 발음이 이상하다는 등의 이유로 놀림을 받은 학자들도 있는데 대부분 남자였습니다. 빠르고 높게 말하는 소리에 과민한 경우도 남자들이 많고요. 따라서 느리고 낮게 설명을 해줘야 합니다.
해당 아이가 정서적으로 다소 유대가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타인에 대해 무차별적인 공격성과 경계심을 과도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굳이 인간관계를 강요하여 스트레스를 높이기보다는, 아이가 인식하는 방식에 대해서 열린 시각으로 다양한 정보를 접속할 수 있게끔 연속된 경험을 찾아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공을 쥐어주고 찌푸리고 다시 원상 복귀하고 그렇게 물질에 집착하게 두세요. 학습에서는 어떤 결과가 올진 모르겠는데.
부모와의 애착에 성공하였더라면 아마도 조금 더 안정적인 프레임 사고를 하고 이에 대해 설명도 가능했을 것 같긴 하지만, 아이 자체가 그러한 사고의 강화에 집착하는 것이 전적으로 부모와의 애착 형성에서만 기인한다고는 생각이 안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