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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인사이트 Oct 05. 2024

수백 명의 이름 중 하나여도 괜찮아


살아있는 동안 이루고 싶은 것 중 하나는 ‘영화 엔딩 크레딧에 내 이름 하나 끼워 넣기’다. 뭐 하나 꾸준히 하지 못하는 내가 5년 이상 매년 100편씩 찾을 정도면 끈질기게 사랑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아무래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그 정도 열망은 품게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좋아하는 것의 일부가 되고 싶은 마음이다.





엔딩 크레딧은 오로지 영화에만 존재한다. 간혹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하나가 끝날 때 맨 아래에 빠르게 이름들이 지나가곤 한다. 자세히 보면 프로그램 제작에 있어 핵심적인 인물들의 이름뿐이다. 그들의 이름이라도 뜨면 다행이다. 요즘은 OTT, 유튜브를 포함해 대부분의 콘텐츠에는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반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은 참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꼭 기억해 준다. 한명 한명 찾아 말로 전하는 대신 한 번에 전하는 공식적인 감사 인사다.


여기에 살짝 찬물을 끼얹는 이야기를 하자면 지갑 사정이 썩 좋지 않은 영화에 참여하면 때로는 페이를 포기하고 크레딧에 이름을 남기는 것을 선택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엔딩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가치가 돈이라는 가치보다 더 큰 무언가가 담겨 있다고 믿게 됐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좋으니, 영화의 무엇인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늘 품어왔다. 꼭 내가 연출이 아니더라도 아주 사소한 역할이라도 기쁠 것 같다. 배우나 감독처럼 눈에 띄지는 않지만, 묵묵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그걸 나만 알고, 내 주변 사람만 아는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감을 느껴도 괜찮다. 그런 사람을 칭하는 단어가 인비저블 맨이라고 한다.


영화에는 수많은 인비저블 맨들이 있다. 기승전결 다 들어가 있는 길고 긴 대장정 끝에는 기다렸다는 듯 몇백 명의 인비저블 맨들의 이름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는데 영화 마지막에야 보여주는 이름들은 진정한 주인공일 테다. 제아무리 짧게 스쳐 지나간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게 엔딩 크레딧을 통해 영화의 일부를 만들어 낸 사람들은 비로소 영화의 일부가 된다.


예술과는 정반대에 서 있는 공부를 하던 대학 시절, 직접적으로 영화인이 되고 싶다는 말은 안 했어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동기에게 넌지시 고백했다. 학과 공부와 동떨어진 망상과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아주 부끄러워하면서. 그런 나에게 내 동기는 늘 ‘꿈꾸리라, 이루리라’라는 동기네 집 가훈을 말하며 꿈꿀 수 있다는 건 아주 멋진 일이라고 했다.


고집 센 사람은 영 별론데. 내가 그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인가 보다. 전공을 살리는 동기들 사이에서 결국 홀로 동떨어져 영상 업계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에 개봉한 상업영화 크레딧에 회사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왔다고 한다. 5초도 채 안 떴을 동료의 이름을 본 동료의 가족은 오랫동안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나도 그 찰나의 순간이 영원한 자부심이 될 순간이 곧 머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을 한다. 그럴 때면 몇 년 전의 그 두 문장이 머릿속을 맴돈다. 정말 꿈꾸었더니 이뤄가고 있는 중일까. 그런 거라면 고집이 세도 꽤 괜찮을 것 같다.


영화인들과 일하는 요즘은 엔딩 크레딧에 올라가셨던 일들을 우러러보며 감탄하는 일이 잦다. 그런데 사실상 그 영화를 아직도 보러 가지 않았다고 하시기도 하고, 영화 몇십 편 찍다 보면 크레딧에 올라가는 걸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기도 한다. 그래도, 그래도, 나도 그렇게 무뎌질 수 있을 때까지 영화와 아주 지독하게 얽히고설키고 싶다. 너무 엉켜버려서 풀 수 없을 정도로! 10년, 아니 20년이 지나 이 글을 보면 나도 그들처럼 피식 웃고 있을까. 지금은 영화인들 옆에서 속으로 열심히 동경하며 그들처럼 되기를 꿈꾸는 아무것도 아닌 풋내기지만 말이다.


영화에 대한 사랑 이야기는 제쳐 두더라도 엔딩 크레딧은 정직한 방식으로 내 이름을 세상에 남기는 일 같다. 


   



남산타워에 이름을 적고 자물쇠를 건다. 어느 오래된 대학가 근처 술집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들로 빽빽하다. 그런 공간을 비집고도 군데군데 틈 사이까지 왔다 간 이들의 이름들이 남아 있다. 심지어는 낙서하면 안 될 관광지나 문화유산에도 이름 세 글자를 기어코 적고야 마는 이들도 있다. 이름을 남겨 일종의 영역표시를 하는 것 같다. ‘나 이 시간, 이곳에서 살아 있었어!’ 하는 무언의 외침.

 

무한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잠깐 반짝하고 살다 갈 존재인 우리가 금방 잊혀진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이름을 남긴다는 건 완전한 죽음이란 사실이 두려운 우리들이 존재했음을 증명하고 잊지 말아 달라는 본능적인 행동일 거라 멋대로 추측한다.


영화 킴스비디오에서도 이제 세상에 없지만 스크린 속에서 영원히 사는 영화인들의 영혼에 대해 말한 바가 있다. 킴스비디오의 감독처럼 그리고 나처럼 지금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영화인들의 영혼을 미치도록 찬양하고 그리워하고 아껴주는 것을 보면 엔딩 크레딧의 가치는 어마어마하게 느껴진다.


결국 나는 이름을 남기는 본능적인 행동을 남산타워의 자물쇠, 오래된 대학가 근처 술집의 벽 대신 영화 엔딩 크레딧에 하고 싶어 하는 셈이다. 이왕이면 좋아하는 곳에 남길수록 좋으니까. 나는 꼬옥 반드시 엔딩 크레딧에 이름을 남기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봐주는 영화일수록 좋다고, 너무나 명작이라 오래오래 회자되고 사랑받는 영화라면 더더욱 좋다고. 그렇게 영화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는 꿈을 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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