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트인사이트 Nov 03. 2024

조사 빠진 하루


요 근래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연말이라 일이 몰리기도 했고, 심적으로 여유도 없었다. 만원 지하철에서 종점인 집까지 서서 오는 날이면 물에 적신 종이처럼 매가리가 없고 자꾸 바닥에 엎어져 늘어졌다. 이런 날 받쳐줄 체력이 없었다. 아, 운동 좀 열심히 할 걸... 지하철 안에서 삐질삐질 흐르던 땀이 바깥 찬바람과 맹렬히 대립하다 말라버리는 일이 잦아졌고, 나는 그대로 환절기 감기열차에 탑승했다.


아까의 후회가 무색하게도 '오늘 준비된 체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라는 핑계를 대며 운동 예약을 취소한다. 운동을 가지 않아서 생긴 시간에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연신 쇼츠와 릴스만 스와이프. 그렇게 자정을 훌쩍 넘기기 일쑤다. 이제부터는 자괴감과의 싸움이다. 싸움은 늘 그렇듯 내가 진다. 집 와서 대체 뭐 한 거지? 이대로 자면 정말 오늘 하루가 끝나 버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몹시 심란해진다.


그렇게 뜬 눈으로 마주한 아침에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알람을 끈다. 오늘도 12시 넘어서 자면 내가 미친 사람이라는 선포를 내린다. 하지만 이상하게 재밌는 일은 모두 밤에 일어난다. 좋아하는 가수의 컴백 소식도, 자주 챙겨보는 오늘의 운세 어플도 모두 자정이 되어야 뜬다. 오늘도 난 또다시 미친 사람을 자처하며 수면부족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평생 이렇게 살아온지라 나는 이게 내게 제법 익숙한 생활패턴이라 생각했는데, 몸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아침마다 잠을 깨우려고 들이키는 2샷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더 이상 효과가 미미하고, 하루종일 정신이 몽롱하다. 상대와 대화 도중, 적절한 단어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 '어... 저... 그...' 삼총사로 말꼬리를 질질 끈다.


보고서나 글을 쓸 적에는 조사 실수를 그렇게 한다. 평소에도 글을 자주 고쳐 쓰고 퇴고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조사 실수가 잦은 편인데, 요즘엔 아예 조사를 빼먹는 일이 다반사다. 모니터 화면으로 봤을 땐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실수들이 인쇄만 하면 어쩜 그렇게 눈에 잘 띄는지. 정말 실수해서는 안 되는 문서일 경우에는, '지구야 미안해...'를 속으로 외치며 종이로 출력해 다시 소리 내어 읽어본다. 오늘도 말도 안 되는 문장 오류 2건를 잡아 회의 전에 겨우 고쳐 썼다.





최근 나의 하루하루가 조사 빠진 하루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조사가 빠지면 문장의 의미가 모호해지듯, 나라는 의미를 또렷이 만들어주는 조사가 듬성듬성 빠져있는 상태. 정신이 흐트러진 나의 하루를 보는 것만 같다. 요즘은 분명한 목적과 의식 없이 시간이 흐르는 대로,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글을 갈기듯 하루를 보낸다.


엊그저께는 엄마랑 같이 저녁을 먹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나오길래 엄마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엉 울었다. 왜 우냐는 엄마의 물음에 그냥 힘들어서 그렇다고 대충 둘러댔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몇십 년을 넘게 살아갈, 그 와중에 꿈을 좇으면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팅팅 부은 눈이 된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엄마한테 메시지가 왔다. 힘내서 점심에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엄마는 메시지와 함께 내게 돈을 보냈다. 지하철에서 미리 보기로 메시지를 읽는데 순간 눈가가 뜨끈해져 서둘러 눈을 감았다. 엄마의 당부에도 맛있는 건 사 먹지 못했다. 아니 안 사 먹었다. 그냥 이 돈을 쓰기 아까워서. 그날은 점심을 먹지 않아도 속이 든든했다.

 

나는 내 삶의 의미를 온전히 내 안에서만 찾으려 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나 혼자서 이뤄지는 것은 많이 없었다. 가끔은 타인과의 대화에서, 무심코 집어든 책 속 문장이, 랜덤 플레이리스트 속 노래가사가, 때로는 날 둘러싼 상황들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영향을 받았고 그들이 내 삶의 커다란 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는 내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어쩌면 이 과정은 마치 나라는 글 한 편을 한평생에 걸쳐 완성시키는 일과도 같겠다는 생각을 한다. 혼자서는 쓸 수 없는 글. 실수를 해도 상관없다. 아직 내 글은 완결 나지 않았으니까. 언제든지 고치고 또 고쳐 쓰면 된다.


그 속에서 나는 나를 응원하는 가족들을 나라는 명사 옆에 단단히 새겨 넣는다. 그리고 다음에 써 내려갈 문장에서 사용할 단어를 소중히 골라 다듬어야지. 다시 시작될 내일 앞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포로감시원에서 전범이 된 무명의 조선인 청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