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소복하게 내려앉고 볼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풀빵 냄새, 고소한 기름 냄새, 달큰한 팥 냄새가 공기를 타고 가득하다. 나는 그 냄새를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셔 최대한 오랫동안 맡아본다. 그리고 그 큰 숨을 내쉬며 생각한다. 겨울이구나, 연말이구나.
언제나 그래왔듯 거리에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장식물이 걸린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 빨갛고 초록빛이 가득한 거리로 그것은 다시 태어난다. 캐롤이 들린다. 작년 이 맘 때에 듣던 노래들을 오랜만에 듣는다. 자연스레 항상 겨울마다 듣는 노래가 생각난다. 검색한다. 오랜만이다. 꽃이 피고 무더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오색의 단풍이 들 동안 나는 이 노래를 안 들었었구나. 눈이 내리던 그 밤에 노래를 틀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원래 듣던 버전이 아닌 다른 버전을 틀어 빠르게 재검색한다. 옳게 찾았다. 썩 기분이 좋다.
벌써 2024년이 다 흘러갔다. 나는 2024년을 속시원하게 보내줄 수 있는 걸까. 모르겠다. 노래의 리듬이 튀어오를 때마다 올해의 기억들이 튕겨오른다. 1월의 순간, 2월의 장면, 모든 기억이 다 다르다. 그 순간들의 감각이 떠오른다. 3월의 햇빛, 4월의 책상, 아릿한 느낌이 문득 든다. 5월의 피곤함, 6월의 고마움, 희비가 교차했던 순간이 기억난다. 7월의 슬픔, 8월의 행복, 오래된 것들을 마주한다. 9월의 사람들, 10월의 손님들, 눈을 감고 오롯이 느낀다. 11월의 시간들, 12월의 소회를.
그립다.
이 감정을 느끼는 필연적인 운명이라도 겨울은 갖고 있는 걸까.
하루는 길지만 과정들은 짧다. 그렇기에 감사한 순간도, 아쉬운 순간도 너무나도 많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다시 그 감정을 느끼고 싶은데, 혹은 그 때로 돌아가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들. 그렇기에 모든 것이 그립다. 좋아서 그립고 슬퍼서 그립다.
가끔 모든 게 지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을 때가 있다. 마치, 이 공간은 망망대해이고 나는 바닷물에 떠서 부유한다는 생각으로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본다. 현재에 대한 모든 것은 잊어버리고 기억 속에 살아보자.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자. 내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눈을 질끈 감고 하나씩 헤아려보자. 그러다보면 끝도 없이 과거 속을 헤엄치는 것이다. 그리운 순간들이 어지럽게 섞인다. 개별로 생각하고 싶은데 떠오르는 것이 너무 많아 하나로 뭉뚱그려진다. 그 모든 것도 그립다.
최근 오랜 친구와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던 우리는 서로의 성취에 대해 덤덤히 축하를 내민다. 우스갯소리도 내뱉는다. 널 처음 본 게 벌써 8년 전이구나. 곧 9년이 되겠고 머지 않아 우리는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을 서로 알고 지낸 게 될 거야. 연락이 뜸해지던 순간에도 그 친구와 함께 했던 순간들을 기억하며, 어쩌면 그리워하며 떠올렸었다. 안심하며 믿을 수 있는 존재. 나는 그 존재도 그리워했던 것 같다.
그리워하니 이면은 행복하다. 이 많은 기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 많은 순간을 겪으며 너와 내가 함께 그 순간을 함께 했다는 것이 행복하다. 기뻤고 슬펐고 화가 났고 즐거워했던 내가 그 모든 감정을 한아름 안으며 행복한 내가 된다. 나는 그런 나마저 그립다.
그리운 것들이 하나의 무형적인 존재가 되어 뒤섞여 총체적인 그리움을 그려낸다. 돌아가지 못하는 시간이 그립고 그 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그립고 그 순간에 다양한 감정을 느낀 내가 그립다. 그러기에 연말은 소중하다. 겨울은 그 추위 속에서 따스한 안간힘을 갖고 있기에 소중하다. 겨울이 되면 그 소중한 것들을 성냥 삼아 불을 피운다. 금방 사그라들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은 행복하니까.
그 소중한 것들을 더 그리워하기 위해, 나는 그리운 순간을 여전히 만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