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나는 전 과목을 백 점 맞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이런 결과의 이유는 전적으로 엄마 덕분이라 해도 무방하다. 전 과목을 전부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이자 엄마는 시험 보기 전 늘 내기를 걸었다. 내가 좋은 점수를 맞아오면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그 말 한마디에 승부욕이 발동된 나는 매번 전력을 다해 공부했고 그 덕에 엔젤폰, 병아리 인형 세트 등 다양한 장난감을 얻어내곤 했다.
초등학교 사 학년 때는 햄스터를 기르고 싶다고 졸랐었다. 그 당시 햄스터를 기르는 게 유행이였기 때문이다. 반려동물과의 이별을 겪었던 엄마는 '동물을 기르기 위해서는 큰 용기와 어느 정도의 두려움이 필요하다'라며 시험을 잘 보면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하셨다.
햄스터를 기를지 말지 결정되는 시험 직전, 나는 긴장 최고조 상태였다. 문제집을 또 보고, 또 보고… 몇 번이나 동그라미를 쳐 너덜거리는 자습서가 목숨 줄이라도 되는 듯 꽉 붙잡았다. 시험을 치르는 동안은 손에 계속 땀이 나 힘들었다. 결과는 백 점. 나는 시험지를 받자마자 컬렉트콜로 달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엔 무서웠던 안내 목소리가 그날만큼은 매우 친절하게 들렸다.
햄스터는 대형마트에서 입양 받았다. 총 두 마리. 서로 싸우지 않게 성별은 둘 다 암컷으로. 이름은 고민 끝에 햄스터의 색을 따 노랑이, 하양이로 지었다. 마트에서 햄스터를 입양 받게 되면 작은 상자 같은 곳에 담아주는데, 차를 타고 가는 내내 햄스터들이 멀미할까 봐 양손으로 상자를 꽉 잡았던 기억이 난다. 햄스터가 밖으로 나오기 위해 박스를 칠 때마다 느껴졌던 촉감이 아직도 선연하다.
정이 많은 우리 엄마는 노랑이, 하양이를 착실히 돌보셨다. 두 케이지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건 기본이고, 핸들링이 된 노랑이를 매일 쓰다듬어 주셨으며, 조금이라도 햄스터들이 이상할 때마다 바로 동물 병원에 데려갔다. 가끔은 케이지 문을 열어 한 마리씩 산책시키기도 했다. 물론 위험하니 집 안에서만. 소심하고 사람을 잘 따르지 않던 하양이는 늘 케이지 안에만 있었고, 노랑이는 케이지를 열어주면 쏜살같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곤 탐색하듯 집안 곳곳을 빠르게 뛰어다녔다. 신기한 것은 꼭 우리가 보일 수 있는 곳만, 즉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곳만 다녔단 것이다.
날 혼내신 뒤 햄스터만 이뻐하는 엄마를 보면 가끔 질투가 나긴 했지만 나도 햄스터가 너무 좋았다. 가족을 소개할 때 늘 햄스터를 함께 소개했고 학교가 끝나고 나면 햄스터 케이지들이 있는 거실 바닥에 달라붙어 햄스터들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햄스터들은 나의 가족이자 동생이 되었다.
햄스터를 키운 지 일 년이 조금 지난 시점부터 노랑이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다리를 삐었고, 또 다른 날은 눈에 다래끼가 생겼으며, 피를 흘리기도 했다. 동물 병원 저울에서 무게를 재는 노랑이는 병원에 있는 그 어떤 동물보다 작고 가벼웠다. 몸뚱아리 안에 일 년의 세월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동물병원 원장님과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나는 노랑이를 보낼 준비를 해야 했다.
때는 오 학년, 기말고사를 치르기 위해 일찍 일어난 아침이었다. 이불 밖으로 나오자마자 노랑이의 상태를 체크하려 케이지로 향했는데 엄마가 나를 막아섰다.
“노랑이는 괜찮아. 근데 지금 안정감을 취해야 하니까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놔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나는 엄마의 말을 듣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학교를 향해 뛰어갔다. 시험 문제를 다 푼 뒤 검토까지 끝마치면 노랑이 생각을 했다. 노랑이 몸이 괜찮아졌으니 예전처럼 손에 올려 쓰다듬을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품으면서 말이다. 내가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엄마는 꽃집에 가자고 했다. 노랑이의 마지막을 기리기 위한 꽃다발을 사자면서 말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작은 치아로 내 인생에 아주 깊은 자국을 남긴 노랑이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니. 나무 관에 노랑이를 넣고 묻었다는 엄마에게 혹시 살아있는데 그렇게 한 건 아니냐고 중얼거렸다. 엄마는 아니라고 말하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나는 소리 내며 끅끅 울었다. 엄마도 나를 꼭 안아주며 함께 울었다.
사정을 들으신 꽃집 아주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주셨다. 우리는 텃밭으로 향했다. 예쁜 돌을 몇 개 골라와 묘지 주변을 둥글게 만들고, 그 위에 꽃다발을 놓은 뒤 노랑이가 좋아했던 음식을 흩뿌렸다. 엄마는 노랑이가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 꼭 좋은 곳으로 갔을 거라며, 자연으로 잘 돌아갈 수 있게 빌어주자고 했다.
햄스터를 보낸 후 며칠 동안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손톱에 무언가 끼어있는 것을 기피하는 내가, 허겁지겁 흙을 파헤친 다음 노랑이를 꺼내는 상상을 했다. 상상 속 노랑이는 늘 살아 있었다.
하양이 또한 몇 개월 살지 못하고 노랑이의 곁으로 떠났다. 케이지에 있던 햄스터들의 흔적을 지워낼 때마다 우리는 눈물을 흘렸다. 흔적은 너무나 쉽게 씻어지지만, 그 안에 담긴 추억은 어떤 비누를 가져와도 지워지지 않으니 말이다. 가끔 노랑이가 다녔던 길목에 놓인 해바라기씨들을 발견할 때마다 울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다른 사진은 지워도 햄스터들이 찍힌 영상은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제 낡은 비디오를 통해서만 햄스터들을 볼 수 있으니까.
김훈 작가의 '화장'을 읽고 납골당이란 우는 자와 울음을 그친 자들이 조우하는 곳이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람에겐 고유의 탄성이 있기에 이별을 겪더라도 일상으로 돌아올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날 이후 나는 몇 개월간 사람 몸의 80%가 물임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열심히 울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 이후로는 울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가끔 햄스터들이 생각나거나 케이지 자리만 하얗게 변한 거실 마루를 보고 기분이 울적해지긴 했다.
하양이 노랑이를 생각하고도 슬프지 않게 된 것은 몇 년 전의 봄날 이후이다. 하교할 때 묫자리에 들러 다녀왔다고 인사하는 것이 이별 후 자리 잡은 습관 중 하나였고,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인사를 하기 위해 묘 근처로 향했다. 그런데 묘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단단한 흙을 뚫은 민들레 하나가 묘 중앙에 활짝 피어 있는 것이었다. 나는 노란 민들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민들레는 몸을 바람에 맡긴 채 평온하게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니, 햄스터들이 행복했고, 행복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하양이 노랑이를 생각해도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예전에 죽음이란 육체를 잃는 순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정의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이들과 살을 부대끼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무언가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며 살아간다. 즉, 우리의 삶이란 타인에게 내 신체 일부를 떼어주는 과정과 같다. 그렇기에 죽음이라는 것은 육체를 잃는 그 순간이 아니라 나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이 이 세상에서 소멸하였을 때 발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별이 두렵다. 이 드넓은 지구에서 우연을 통해 내 곁에 있어 주는 이들이 영영 떠나지 못하도록… 모두 껴안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하는 순간에도 지구는 눈치 없이 부지런히 돌아간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이런 두려움에 휩싸일 때마다 하늘에 있는 하양이와 노랑이가 작은 몸뚱아리를 최대한 벌려 나를 꽉 껴안아 주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