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듯이 말하길, 말하듯 살길

by 아트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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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글에서 소리가 들린다. 어떤 때는 향기도 난다.


연필로 꾹꾹 눌러쓰든, 펜으로 흘려 쓰든, 키보드로 또각또각 타자를 치든 지문이 남기 마련이다. 그래서 글은 ‘그 사람’이 되어간다.


“말하는 시간보다 쓰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아.”


조금 과장해서 말했나 싶다가도 이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사는 삶, 고요한 일상, 전화 통화에는 통 흥미가 없는 날들과 그게 좀처럼 싫지 않은 내가 모여 오늘이 되었다. 다만, 요즘 들어 일부러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말을 너무 못하는 것 같아서.


대학 시절(그리 멀지 않은), 시창작 교양 수업을 들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좋아하는 시인이 우리 학교의 교수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좋아한다’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수험생 시절 우연히 펼친 시집에서 한 구절을 읽은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한 줄은 오래도록 남았고, 독서실 자리 한편에 조용히 머물렀다. 그의 이름을 단번에 알아볼 만큼 선명한 기억이었다.


수강신청을 마치고 그분의 시집을 정독했다. 나름의 예습이었다. 그러나 수업에서 교수님을 ‘다시’ 뵈었을 때, 그분은 내가 알던 ‘그 시인’은 아니었다. 교수님은 좋은 시인이자 탁월한 교육자셨다. 그는 시에 진심이었고, 그 시에 깃든 철학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미사여구를 버린 단문의 힘을 그때 처음 알았다. 수업을 들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존경하는 스승을 얻은 대신, 동경하는 시인은 놓아드려야 했다.


다정한 글을 쓰는 사람은 다정한 사람일 거라 믿는 건 잘못일까. 숱하게 기대하고 그만큼 실망했던 날들에 대해서는 그저 내 탓을 하고 싶다. 그럼에도 내 글에서 배신감, 혹은 그 비스름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적었으면 한다. 그 간극을 좁혀 나가고 싶다. 다정한 건 병이 아니니까.


초고는 말과 비슷하다. 말은 퇴고할 수 없다. 한 호흡에 말할 수 있는 만큼이 초고다. 그래서 내가 ‘쓴 말’들을 자주 되짚어본다. 다정한 단어들을 수집해 본다. 더듬거릴지 몰라도 말하기를 주저해 본다. 느리게 말하는 연습을 해본다. 다정함을 연기해 본다. 나조차도 속을 수 있게.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쩌면 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쓰듯이 말하고 싶다.


말하듯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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