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인간에게 완벽한 기억 능력이 있어서 보고 겪은 모든 일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수 있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쩌면 그 사회에선 ‘미화’나 ‘왜곡’이라는 단어는 탄생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모든 사람이 일어난 일을 정확히 그대로, 누구나 똑같이 기억하니까. 흠, 게다가 어쩌면 일정표는 물론 달력도 없을지도 모르지. ‘오늘이 며칠이죠?’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잊고 싶지 않은 일들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게 되겠지만, 잊고 싶은 기억도 영원히 안고 가야 할 테다.
하지만 ‘완벽함’이라는 건 너무 위험한 존재다. 나는 지금이 좋다. 망각은 어떤 면에선 축복이다. 행복했던 기억을 영원히 붙드는 것보다는 절망적인 기억을 흘려보내는 걸 택해야 하는 순간도 오니까. 게다가 잊는 걸 너무 슬퍼할 필요도 없다. 우리에겐 떠나가는 기억을 일부라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
찰칵.
우리는 사진을 찍는다.
처음으로 사진을 찍어본 게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유치원 때의 사진 중에 목에 장난감 사진기를 걸고 브이 자를 그리던 게 있으니 어쩌면 그즈음부터였을지도. 중학생이 되면서 조금씩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나름 꽤 열심히 찍고 다녔다. 한때는 캐논, 소니 같은 디지털카메라(DSLR)를 구해 진지하게 사진 연습을 해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도 오로지 ‘폰카’ 외길만 걷고 있다.
빛을 그리는 도구인 사진은 솔직하다. 내 눈앞에 놓인 것을 그대로 담아낸다. 그림과는 달라서 가지 않은 곳, 보지 못한 것의 모습을 상상만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 말은 즉, 누군가가 찍은 사진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경험하며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게다가 우리는 보통 무언가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찍는다. 아름답거나, 신기하거나, 기이하거나, 웃기거나,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그 때문에 사진가들이 많은 인터넷 카페 등에 가보면 제각기 중시하는 분야가 달라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똑같은 여행을 가도 누군가는 사람을 찍고, 누군가는 자연을 찍고, 누군가는 건물을 찍는다. 참고로 나의 경우엔 주로 풍경과 음식 사진을 즐겨 찍는다.
사진의 본질은 ‘기록’이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렇다. 아름답고 보기 좋은 사진 작품을 보면 감탄이 나오지만, 왠지 그게 사진의 존재 목적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쉽게 고개를 끄덕이진 못할 것 같다. 애초에 ‘예쁜 사진’은 ‘사진’의 일부분에 불과하지 않은가? 일부가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맛있는 음식은 먹으면 물론 기분이 좋지만 ‘맛있음’은 음식의 부가가치 중 하나일 뿐이지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다. 어떤 생명체든 음식은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해 먹는다. 그리고 사진은 기록하기 위해 찍는다. 아무리 추한 것이어도, 내가 보는 것을 기억해 두기 위해 카메라를 켠다. 다른 사람에게 공유하기 위한 사진이더라도, 일차적으로는 ‘기록’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신기하게도 예전에 찍어둔 사진들을 보면 그 순간 그날의 기억이 거짓말처럼 떠오르기 때문이다. 내가 음식 사진을 찍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풍경은 아름다운 모습을 두고 간직하며 들여다보기 위해 찍는 게 크다. 하지만 음식 사진은 심미를 많이 따지지 않고 찍는다. 가족의 생일날 왁자지껄하던 고깃집, 친구와 오들오들 떨다 들어간 양식집, 처음 도전해 본 카페, 여행 가서 무작정 들어간 로컬 식당, 집 앞 전통시장의 작은 노포….
감성 식당에서 아기자기하게 찍은 음식 사진도 많지만, 연기 때문에 뿌연 사진도, 웃느라 흔들린 사진도, 구도가 엉망인 사진도 많다. 상관없다. 남들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찍는 사진이 아니니까.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과 같이 머물렀던 그 순간의 공기를 담고 싶어서 촬영 버튼을 눌렀던 나만의 작은 기록이니까. 평이하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전날 먹었던 저녁 메뉴조차 기억이 안 날 때도 많지만, 10년이 지난 사진이어도 그건 보는 순간 단번에 누구와 무엇을 하다 어떤 순간에 찍었던 건지가 생각난다. 그래서 나는 사진을 찍는다.
당신의 사진첩은 어떤 사진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이제 또 하나의 해가 끝나간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한 번쯤 갤러리를 켜고 천천히 들여다보길 권해본다. 어쩌면 정리되지 않은 몇천 장의 사진들이 무질서하게 어질러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나의 하루하루를 구성하는 순간들이다. 일 년 동안 당신은 어떤 것들을 마음에 품으며 살아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