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마이라를 짊어진 모든 나그네들에게

by 아트인사이트


요즘 유행하는 말이 있다. 바로 특정 단어 뒤에 ‘통(痛)’을 붙여 어떤 괴로움을 겪는지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이통’은 현재 자신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생각에 오는 고통이고, ‘취준통’은 취업 준비의 어려움에 느끼는 아픔이다. 자매품으로 ‘외모통’, ‘실력통’, ‘연말통’, ‘출근통’ 등이 있다.


나의 경우 ‘존재통’을 겪는다. 존재통은 바로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통증이다. 정확히는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이 통각을 유발한다.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모두 피투성에 있다. 하이데거에서 사르트르로 이어지는 이 ‘주어진 것’, ‘던져진 것’의 개념은 존재의 본질적 고통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우선 인간은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졌기 때문에 첫 번째로 고통스럽다. 두 번째로는 바로 내던져진 상태, 그 자유로운 상태에서 온전히 자신의 선택과 결정만으로 본인의 삶을 개척하고 전부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또다시 고통스럽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는 자유롭기를 그만둘 자유가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고통스럽다. 결국 인간이 피투성으로 태어나 자유를 선고받은 채 기투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무기력하게 태어나 이제 겨우 백세시대 사분의 일만큼을 살았다. 눈앞엔 족히 세 배는 되는 시간이 놓여있고, 쉬운 일 하나 없이 매 순간 말 그대로 기투하며 삶의 가능성을 혼자 만들어 나가야 한다. 미래는 온전히 내 손에 달렸고, 하루하루 존재통을 견디며 사는 일의 힘겨움을 버텨야 한다. 고민과 역경, 시련의 순간들도 거치고 실패도, 탈락도 이별도 다 경험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나 하나 먹고 살자고 이 모든 것을 겪어야 하는데, 먹고 사는 일에 비해 그 비용이 터무니없이 큰 것 같다. 이 모든 것을 관둘 자유도 없고, 정말이지 삶에 갇힌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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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인간 조건과 괴로운 삶의 특성을 보들레르는 ‘키마이라’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표현했다. 키마이라는 앞은 사자, 뒤는 뱀, 가운데는 염소(또는 양)이며 머리가 셋인 전설의 괴물이라고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묘사되어 있다. 보들레르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민음사, 2008)에 수록된 「각자 자신의 키마이라를」에서 시인은 인간의 등에 지워진 “어마어마한 키마이라”들을 포착한다. “막막한 잿빛 하늘 아래” 마주한 그것은 “밀가루 부대나 석탄 부대, 혹은 로마 보병의 장비처럼 무거워” 보인다. “탄력 있고 강한 근육으로 인간을 덮어 사고 짓누르고 있”는 키마이라는 좀처럼 떨어질 생각 없이 “두 발톱”으로 달라붙어 “인간의 이마”까지 넘어온다.


시인은 “그중 한 사람에게” 묻는다. “그들이 대체 어디로 그렇게 가고 있는지를.” 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네 삶이 그렇듯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누구도 모른다. 그 한 사람은 “그러나 걸어야 한다는 어떤 욕구에 의해 떠밀리고 있으니까, 어디로인가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답한다. 시인은 그중 누구도 “자신의 등에 붙어 매달린” 키마이라에게 화내지 않는 것을 기묘하게 여긴다.


그들은 키마이라를 “자기 육체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피곤하나, 진지한 모든 얼굴”은 “영원히 갈망해야 하는 운명의 선고를 받은 자 같은 체념의 얼굴”이다. 시인은 이 행렬이 지나간 후 “집요하게 이 신비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써”보며 인간 조건의 초월과 이상의 추구를 시도한다. 그러나 세계의 “무관심”이 “덮쳐”와 “괴물 밑에 있던 그들보다 훨씬 더 무겁게 짓눌”리며 삶의 비극을 체험한다.


삶의 무게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꼭 합격해야 하는 시험에서의 탈락, 10일까지 내야 하는 관리비. 올해까진 이뤘어야 하는 것들, 연말에 찾아뵈어야 하는 가족들, 졸업장과 다음 주의 면접 일정 등등... 우리들의 어깨엔 각자의 키마이라가 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는 이 괴물을 잃기 위해 집념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삶과 인간 조건의 본질이 곧 키마이라라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존재의 피투성과 기투성이란 특질을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방편일지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달라붙은 이 삶의 무게가 “우리 육체의 일부분”임을 마주 보며 인지할 때, 얼굴에서 “절망의 빛”을 덜어내며 걸어가고 “무관심이 덮쳐”와도 “길을 계속”할 때 우리도 보들레르처럼 악에서 꽃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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