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라는 사람 / 엄마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면 / 지중해의 영감
선정 및 정보 제공 - 출판저널
<출판저널>이 선정한 [편집자 기획노트]는 편집자가 직접 들려주는 '기획노트'를 통해 책 기획 의도와 제작 후일담을 전합니다.
노무현이라는 사람
엄마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면
지중해의 영감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노무현
전화가 왔다. 이창재 감독님이었다. 영화 <노무현입니다> 개봉을 앞두고 막바지 편집 작업 중이라 밤낮없이 지내고 있다며 이 영화를 꼭 책으로도 내고 싶다고 하셨다. 그 말을 전해들은 첫 마음은 의아함이었다. 감독님의 이전 작품들과 결이 너무도 다르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두 번째 마음은 두려움이었다. 내년이면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다.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노무현'을 콘텐츠로 다루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전직 대통령인 데다가 극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이라 무슨 말을 해도 조심스럽다. 게다가 ‘노무현’이라면 누구나 일장 연설을 늘어놓을 만한 주제이기도 하다. 마지막 마음은 욕심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책을 편집해볼 수 있다니, 과분한 영광이었다. 이 마음은 금세 후회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감독님은 영화를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합류할 테니 먼저 영화의 원재료인 인터뷰를 파악하라며 자료를 보내주셨다. 받아들고 보니 분량이 어마어마했다. 마흔여섯 명을 인터뷰한 총 200시간의 영상과 A4 1,500매의 거칠게 작성한 녹취록이었다. 인터뷰 영상 전체를 한 번 훑는 데만 보름이 넘게 걸렸다. 자료를 읽어나가자 왜 이창재 감독님이 책으로 내고 싶어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인터뷰이들을 어떻게 설득하셨는지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노무현의 내밀한 일화가 수두룩했다. 재미있었고 감동도 있었다. 버릴 것 없이 모두 주옥같은데 200시간짜리를 2시간 채 안 되는 영화로 만들려니 아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노무현.' 핵심 카피로 쓰인 이 말이 딱 맞았다. 나도 사실 노무현을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지만 자만이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유쾌하고, 강박적이고, 섬세했고, 착한 사람이었다. 책의 콘셉트가 단번에 정해졌고, 잘 알려진 일화는 최대한 거르려고 했다. 대신 '인간 노무현'을 잘 드러내는 소소한 일화는 꼭 살렸다. 미디어에 한 번도 노출되지 않았던 인터뷰를 전면에 내세웠고 (물론 홍보할 때는 유시민, 문재인, 김경수, 명계남 등을 인터뷰했음을 최우선으로 밝혔다) 그중 국정원 직원으로 노무현의 담당 감시자였지만 동시에 오랜 친구였던 이화춘과 노무현 변호사 시절 그의 운전기사였던 노수현의 이야기에 비중을 많이 두었다.
또한 노무현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진을 발굴하는 데도 신경을 많이 썼다. 마지막으로 노무현을 이야기하려면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정치적 상황을 말하지 않을 수 없기에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도 읽을 수 있도록 역사적 사실이나 상황 설명을 적절하게 곁들였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9주기에 맞춰서 출간하고자 했기 때문에 일정도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해서 5월 23일에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출간했다.
인터뷰이 중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반칙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나 혼자 깨끗하게 산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으려는 순간, 머릿속에 슬그머니 노무현이 들어와 우리 같이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자고 말합니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독자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조금 착해지는 경험. 한 권의 책이 그렇게 거창한 기능을 하는 것에 거부감과 의심이 들지만 노무현을 거의 1년 반 동안 붙들며 책을 편집한 나도 약간 더 착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안 그랬다가는 책에게 혼날 것만 같다. 그런데 사실은 그저 재미있게나 읽혔으면 하는 것이 진심이다.
글/ 최민화 수오서재 편집팀
아이를 낳고 만난 두 개의 세상
'비혼' '비출산'을 다짐했던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아이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여주고 즐거움을 알려줬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이 사회가 요구하는 육아와 살림이라는 과제가 여자를 짓눌렀다. 엄마, 며느리, 아내, 직장인 역할까지 하느라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았고, 누구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여자는 행복을 되찾기 위해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라는 인간이 다시 보였고,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문제가 또렷이 보였다. 그렇게 현미 씨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현미 씨를 만난 건 2016년 가을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였다. 도저히 아기 엄마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앳된 얼굴에 기자 같지 않은 수더분한 성격의 그녀는 얼마 전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을 한 상황이었다. 일을 하면서 육아와 살림도 하느라 '파김치'가 되어 살았던 현미 씨는 몸담은 신문사에서 <엄마도 처음이야>라는 칼럼을 연재한 덕분에 숨통이 트였노라고 말했다. SNS에 일상을 기록해본 적도 없는 자신이 일간지에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같은 현실에 처한 아기 엄마들과 댓글로 소통하며, 심리상담의 효과가 이런 것일까 싶을 정도의 큰 위로를 받았다 했다. 현미 씨는 자신과 비슷한 현실에 있는 여자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한 가지만 부탁했다. 매체에 연재하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검열하지 말아 달라고. '여기까지 써도 되나' 싶을 정도로 깊은 속내를 드러내 달라고. 망설인 끝에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이던 현미 씨의 하얀 얼굴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이가 어린 탓에 원고를 받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현미 씨는 아이가 잠든 새벽녘 숨죽이며 키보드를 두드렸고, 취재와 취재 사이 카페에서 노트북을 꺼내가며 덮어뒀던 기억을 꺼내놓았다. 겨울, 그리고 또 한 번의 사계절이 지나는 동안 아이는 자랐고, 덕분에 할 이야기는 더욱 많아졌다. 학창 시절, 교환일기를 쓰듯 원고를 주고받은 지 1년여 만에 《엄마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면》은 세상 엄마들 손에 쥐여지게 되었다.
이 책이 이야기하는 건 현재 30대로 살고 있는 한국 여성들의 보편적인 삶이다. 1980년대에 태어나 희미한 가부장제의틈에서 사회적 성취를 위해 달려오다 결혼으로 ‘여자의 현실’을 알아버린 30대 기혼 여성의 흔한 일상. 하지만 그 일상 속에서 엄마들이 겪는 문제들의 뿌리는 한국이라는 곳에서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사회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개인적으로 보이는 현미 씨의 경험과 고민은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도약이기도 하다.
책이 나온 날, 현미 씨는 출판사 앞으로 달려왔다. 살아온 시간을 고스란히 쏟은 책을 양손 가득 들고 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첫인상과 다르게 단단하고 경쾌했다. 엄마의 시간이 준 변화일까? 아니면 말과 글이 준 치유의 힘이란 게 이런 걸까? 그게 무엇이든 이 책을 읽은 엄마들도 현미 씨처럼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면 좋겠다.
글/ 송두나 부키 선임 에디터
카뮈처럼 내게도 '섬세한 스승'이 되어주었다
알베르 카뮈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장 그르니에는 우리에게 새삼스런 작가는 아니다. 그의 책들은 1980년대에 청하 출판사에서 전집 형태로 거의 대부분 번역 출간된 적이 있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산문집 네댓 권은 이후 두어 곳 출판사들이 정식 판권 계약을 맺고 새로 번역 출판한 뒤로 지금까지 꾸준히 읽히고 있다. 그중에서도 《섬》은 단연 애독서로 꼽는 이들이 많은 스테디셀러다. 나 역시 대학시절 이 책을 읽고 난 뒤 그르니에의 매력에 빠졌다. 글에 흐르는 어떤 고독과 허무의 감정이 아마도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방황하던 그 시기 나의 감수성을 자극했을 것이다. 세계의 덧없음, 그러므로 오히려 이 세계를 열렬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역설의 진리를 잔잔히 일깨워준 그는 카뮈처럼 내게도 '섬세한 스승'이 되어주었다.
졸업과 동시에 출판사에 들어가 원하던 편집 일을 시작한 나는 몇 년 뒤에 뜻밖의 인연처럼 《섬》에 비견되는 또 하나의 훌륭한 그르니에의 산문집 《지중해의 영감》을 편집할 기회가 주어졌다. 출판시장에 여행기 붐이 일면서 회사도 관련 시리즈를 만들었고 그중 한 권으로 이 책을 기획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선배들의 도움에서 차츰 벗어나 홀로서기를 해야 할 즈음 맡게 된 이 책은 기쁘기도 했지만 부담도 컸다. 시적이고 명상적인 그르니에의 원문이 지니는 난해함 때문인지, 그래서 번역이 녹록치 않았던 탓인지, 마치 동굴 속을 더듬듯 번역 원고를 몇 번이나 읽고 아직 어설픈 교정 실력으로 진땀을 빼며 고친 기억이 생생하다. 짧은 편집 경력으로는 역부족인 텍스트였다. 그러나 동경해 마지않던 작가의 책이어서 열정만은 뜨거웠다. 그리고 먼 훗날 든 생각은, 1988년 청하 판 번역을 그대로 가져와서 문장을 조금 손보는 정도로 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자가 다시 번역했다면 하는 아쉬움이었다.
독립해서 출판을 시작하고 이 책을 다시 내보자 생각한 데는 그런 아쉬움이 줄곧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작년 5월, 늘 역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김화영 선생님을 옥수동 한 카페에서 처음 만나 뵈었다. 선생님은 빛바랜 낡은 nrf(갈리마르 출판사의 전신, Nouvelle Revue Française)판본을 보이시며 오랫동안 마음에 둔 책이라며 번역을 흔쾌히 수락해주셨다. 이름 없는 신생 출판사의 제안을 받아주신 데는 그만큼 책 자체에 대한 애정, 무엇보다 카뮈의 발자취를 좇아 지중해 여러 곳을 편력했던 젊은 날의 향수가 있으셨기 때문이리라. 그르니에 전문가인 파트리크 코르노 교수의 충실한 해설까지 싣게 된 것도 선생님 덕분이었다.
《지중해의 영감》은 이렇게 다시 한 번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새 원고를 떨리는 마음으로 열어 읽었을 때, 이 책은 예지에 찬 그 특유의 시적 언어를 범상치 않게 드러냈고, 그 옛날 신출내기 한 편집자에게 모호함으로 기억되었던 많은 문장들은 비로소 명확한 의미를 띠었다. 그랬다, 빛 밝은 지중해는 "영적인 한 편의 시를 이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풍경을 찬란히 펼쳐냈고, 그르니에는 바로 거기에서 "영원을 암시하는 어떤 간결함"을 엿보았다. 이는 행복과 뗄 수 없는 어떤 진리를 말함이었다. 《지중해의 영감》은 안락한 삶이 아니라 충만한 삶을 살려는 자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네는 기이한 책이다.
글/ 박희진 이른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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