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아트인사이트 Aug 06. 2019

[시를 다시 쓸 때까지] 10. 폭염의 순기능

 

 

   

 

폭염에도 순기능이 있다. 환경 문제를 얘기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환경 문제를 논한다고 한다면 나는 순식간에 회의주의자로 변해 의기소침하게 굴 테니, 글을 읽는 여러분도 나도 썩 유쾌하진 않을 테다.

 

어쨌든,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아주 극성의 여름 혐오자였다. 7, 8월이 되면 습관적인 우울감에 빠져 지내곤 했는데, 내게서 '한여름에 실내가 아닌 곳을 활보하고 다니는 것'은 그다음 하루 이틀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땀을 한바탕 쏟고 나면 심리적 에너지도 덩달아 고갈됐고, 더위에 지쳐 늘어진 육신을 물끄러미 보며 내가 느끼는 이 무거운 기분이 저질 체력에 대한 자괴감인지 달아오른 두피의 열인지를 분간하느라 아주 심각해지곤 했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 있는데, 여름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계절이다. 심지어 에어컨 바람을 지나치게 쐬어 두통으로 골골대는 건 일상이었으니 나는 '여름이 싫다!'라고 외칠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런 내가 180도로 변했다. 체질이 바뀌어 더위를 덜 타거나 여름 스포츠를 즐기게 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심지어 최근엔 '여름 좋아!'라고 말하면서 부동의 최애 계절이었던 겨울을 왕좌에서 내쫓았다. 이제 내 계절의 퀸은 '여름'이다. 여전히 나는 여름이 되면 바닥난 체력으로 낑낑대고 삼일에 한 번꼴로 두통에 시달린다. 이 가학적인 더위에 비로소 쾌감을 느낄 수 있게 된 건 절대 아니고, 더위에 지친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묘하게 즐겁다는 걸 점점 알게 되면서 뭔가가 달라졌다.

 

무슨 괴랄한 말인가 싶겠지만, 실제로 나는 지친 채로 방바닥을 나뒹굴거나 의자에 널브러져 아무 말 대잔치를 하는 것이 의외로 흥미로운 일임을 발견했다. 가만히 있어도 숨쉬기가 어렵고 등줄기와 이마에 땀이 줄줄 흐르면, 아무리 지엄한 양반 같은 사람이라도 콧김을 내뿜으며 이골을 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말 사소한 소망들을 입 밖으로 흘리는 법.

 

이를테면 아, 제주도 가고 싶다. 차가 한 대 있으면 좋으련만. 시원한 망고 바나나가 당긴다. 여름 옷 많이 갖고 싶다. 그 옷들이 잘 어울리는 몸매라면 좋으련만. 부산에서 먹었던 회 맛있었는데. 만약 해외여행으로 딱 한 군데를 누가 보내준다 하면 어딜 갈 테냐. 유럽에서 근사한 노을 보고 싶다. 하다못해 호캉스라도. 다 필요 없고 닭튀김에 맥주 한 잔. 엄마아빠 보고 싶다.

 

시시껄렁한 농담 같은 소망을 툭툭 주거니 받는다. 그러다 보면 픽 헛웃음이 나오거나 한숨이 터지곤 하는데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런 순간을 나누는 게 좋다. 당장 몸을 일으켜 실행할 것도 아니면서 혹은 그럴 여유도 없으면서, 일단 심드렁하게 노래하는 거다. 세계 평화나 올바름을 주창하는 거대한 신념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라 해도 과언이 아닌 하찮은 소망들을 들려주다 보면 우리가 진짜 '친구'라는 생각이 든다. 낮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혹은 얼음이 다 녹아 밍밍해진 커피를 앞에 두고, '입'만 간절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꼴이 우습다는 걸 인지해도 상관없는 사이. 이해하니까, 가소로우면서도 연민하고, 그럼에도 의심 없이 사랑하는 사이.

 

그렇게 쉽게 지나가는 말들은 '언젠가 꼭 같이 하자'라는 말로도 들리고 '언젠가 꼭 널 떠날 거야'라는 말로도 들리고 '사실 다 필요 없어'라는 말로 다가올 때도 있는데, 그때마다 묘하게 기쁘고 슬프고 벅차다. 이마와 인중 위에 송골송골 고이는 땀방울을 의식하면서 나는 내 친구들의 마음을 이 여름이 기억해주기를 기도한다. 이어지는 가을과 겨울에게 소문 내줬으면 좋겠다고. 한 계절, 두 계절이 지나서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면 얼마나 행복할까. (물론 절실할 정도로 기도하는 건 아니고.)

 

내가 여름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이 모든 부질없는 대화가, 무성하게 푸르러지는 자연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거대한 열기 속에서 빛과 그림자는 짙어지고 나무가 있는 풍경이 선명해진다. 그 사이에서 우리의 느린 말소리는 두런두런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고 이어진다. 먼 우주에 우리의 말소리가 닿는다면 아마 잠꼬대 같을 지도 모른다.

 

지구가 태양의 곁을 묵묵히 회전하는 것만이 '중요한 일'인 것 같은 계절. 폭염은 괴롭다. 내 몸보다 더 뜨거운 것을 견딘다는 건 원래 괴로운 법. 그러니 가슴속에 조금이라도 더운 감정이 있다면 툭 댐을 허물 듯 쏟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여름과 함께 활활 타오르다 스러질 수 있도록 말이다. 조금은 얼빠진 모습으로 여름의 잔인함에 혀를 차며, 그래도 사실 너와 삶을 사랑한다고, 재잘재잘 수다를 시작하는 것이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김해서

 

 

ART insight

Art, Culture, Education - NEWS

https://www.artinsight.co.kr

 

 

작가의 이전글 씁쓸한 핫플레이스, 문래창작촌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