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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지협 Apr 14. 2022

할머니의 운동화

안 아픈 데가 없는 할머니를 위한 선물

어린 시절, 내 기억 속 할머니는 언제나 패셔니스타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겐 그런 존재감 있는 사람이었다. 


결혼 후 한 달에 한 번 방문하는 것도 어렵다는 걸 몸소 느끼고 있을 무렵, 하얀 머리의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나와 함께 있을 적에는 매번 한 달에 한 번씩 파마와 염색을 꼭 챙겼던 할머니였는데, 못 본 새 내추얼 해진 할머니의 모습이 가끔 낯설지만 이마저도 할머니의 모습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다. 내가 이런데 할머니는 오죽 어색하실까 싶었다. 


멋을 우선으로 생각하실 수도 있으나, 그 와중에 손녀 체면을 위한 특급 조치 중의 하나였을 테다. 


"네가 나랑 같이 어딜 가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해야지."


할머니가 나를 위해 애써왔단 생각을 해본 적 없던 내겐 그 말을 무심하게 꺼내놓는 할머니가 낯설고 신기하고 고마워서 그 말을 기억하면서 가끔 곱네였다.


다른 사람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며, TPO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 그런 할머니가 변해가고 있었다.  





전에 못 보던 신발이 현관문 앞에 놓여있었다. 새 신발치고는 닳아서 이상했지만 할머니께 물어봤다.


"할머니, 신발 새로 샀어요?"


이모 신발과 바꿔신었다는 할머니의 말에 놀랐다. '할머니가 그럴 리가...?' 생각해보니 옷이나 신발 등 뭔가를 사러 갈 적에는 항상 나와 함께였다. 그런 내가 없었다. 결혼 후에 코로나가 터진 바람에 쉽사리 할머니 댁에 가지고 못했고, 맘 편히 백화점에 가볼 수도 없었다. 


가정형편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길래 쉽게 사달란 말도 꺼내기 어려워하시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고, 나 역시도 위험한 상황을 가능한 만들지 않기 위해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외출을 삼가였었다. 할머니는 색이 바르고 닳아가는 중인 신발을 꿋꿋이 신고 계셨다. 

 

신발장의 신발을 살펴봤다.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90%의 신발이 내 눈에 낯익은 신발들이었다. 젊은 시절 멋 낸다고 구입했던 표피 무늬 구두부터, 함께 구입했던 가벼운 여름용 신발까지... 버리지 않고 모아 두고 계셨다. 전에 내가 알고 있던 할머니 같으면 분기별마다 옷을 같이 보러 다녔고, 1년에 한 번 정도는 신발을 갈아보기도 했었는데. 마음이 아려왔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처럼, 내가 떠난 자리는 할머니가 견뎌내기에 더 어렵지 않았을까 싶어서. 


할머니가 편하게 신고 다니시는 신발, 운동화.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회사에서 단체로 받은 유명 브랜드 신발 상품권이 생긴 김에 할머니와 외출을 해서 직접 보고 구입했던 추억의 운동화였다. 벌써 10년 정도 시간이 흐른 것 같다.  


할머니는 변덕쟁이가 아니셨다. 


다 있고, 멀쩡한 데 왜 사냐고 핀잔만 늘어놓기 일수였던 나였다. 뭐하러 사는 건지 이해가 안 됐기도 했고, 귀찮기도 했고, 크게 의미 있는 지출이 아니란 생각이었기 때문에 불만에 가까운 반응이었으리라. 


불필요한 시간이라 여겼고, 쓸모없는 지출이라 생각했던 모든 게 추억이 되었다. 할머니는 사러 가자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셨고, 언제 같이 구경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지음아, 네 주려고 이거 미리 사뒀다."


외출하는 게 어려운 할머니가 모처럼 나갈 때 본인의 옷보다 내 옷이 먼저 눈에 들어왔는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미리 사두시곤 그날 바로 전화로 자랑스레 말해주셨는데. 신랑하고 집에 갈 적에 슬쩍 따라오라 언지주시고는 몰래 건네주시곤 했다. 모든 '네 생각나서'라는 말로 밖에 표현할 없다. 걱정과 그리움, 보고 싶은 마음 복합적인 감정이 오롯이 담긴 선물이라서... 


"돈 아깝게 또 뭐 하러 샀어요. 할머니 거로 사지. 돈도 없을 텐데..." 


속상한 마음에 이런 말부터 튀어나왔다. 살가운 손녀는 아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랬다. 그래도 할머니의 마음은 아주 조금 살펴보게 되었다.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고마운 마음, 애틋한 마음이 더 깊어질 나날이 다가올까 봐 벌써부터 두려워진다. 




무릎 관절염을 기본으로 이미 한쪽 어깨도 제 구실을 하기 어려워졌고, 젊은 날부터 밥먹듯이 한 고생 때문에 휘어진 손가락과 무지외반증으로 앓게 된 발가락 통증으로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어려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걸 같이 사는 동안 잘 몰랐었다 바보같이. 발가락에서 자라난 뼈가 튀어나왔고 걸을 때마다 고통스러워 수술을 해도 다시 원상복귀돼버리는 얄궂은 현실에서, 


할머니는 최선을 다해 움직이셨고, 견디고 계신다. 아파도 힘들어도 꾸역꾸역 못내 아픔을 이겨내는 중이시다. 그 무게를 함께 견뎌줄 운동화가 필요했다. 낡아도 못생겨도 같이 해줄 무언가가... 이모의 헌 운동화일지라도 괜찮다며 바꿔 신고서 좋아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왜 그리도 슬펐는지. 


"지음아, 네 신발 어디서 샀니. 이런 거 하나 사고 싶은데... 돈 줄 테니 하나 사줄래?"


오랜만에 할머니 댁에 방문했을 때 할머니가 내놓은 제안이었다. 바꿔 신을 수도 있었고, 그냥 드릴 수도 있었다. 다만 깨끗한 편이 아닌지라 하나를 사드림 되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쉽게 생각했었다. 막상 할머니께 신발을 사드리려고 찾아보니 어떤 게 맘에 드실지 고민이 됐다.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쇼핑몰 검색도 해봤다. 할머니 발 상태에 맞고, 원하는 디자인과 색감. 브랜드와 가격 등 여러 가지를 고려했으나 썩 마음에 드는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괜히 걱정 끼쳤네, 내가 왜 자꾸 신발 타령하는지 모르겠네. 신발 신고 어디 가려고 그러나... 안 사도 있는 걸로 신으면 되니까 신발 살 걱정마라." 저녁에 전화하신 할머니가 이내 다음날 점심 무렵 "어제 보낸 신발 사진 중에서 첫 번째 누런 것도 좋고, 두 번째 사진 흰 운동화 그게 낫겠네. 아무거나 다 좋다." 


아주 가끔은 할머니의 시시콜콜한 부탁이 솔직히 귀찮기도 하다. 시간들이고 공들여서 구입해도 썩 맘에 들지 않은 안목인지라... 심부름에 대한 만족감이 많이 떨어진달까. '그럼 그렇지.' 싶은 속마음과 함께 반가웠다. 찾아보느라 쓸데없이 기운만 빠졌던 상태였는데, 할머니의 부탁에 다시 기운을 내서 찾아봤다. 덕분에 새로 알게 된 브랜드와 여러 신발들을 눈 여겨볼 수 있었다.


인터넷으로 구입했던지라 실물, 재질을 보지 못한 게 맘에 걸렸었고 특히 사이즈가 맞을지가 관건이었다. 예상대로 할머니 마음에 들진 않으셨던 것 같다. 


"신발 포장이 매우 고급스럽게 잘 나와서 한참 뜯었네. 근데 재질이 별로 안 좋더라."


쿨한 할머니의 바른말로 상황 파악 1초 만에 끝내고서 아쉬운 마음에, "사진상 원래 그랬어요. 여름에 신는 걸로 공기 슝슝 통하게 생긴 거지~" 받아쳤지만 전화를 성급히 끝고는 혼자 속상했었다. 


아침에 할머니는 내가 사드린 신발이 편하고 좋아서 어제 신고 노래 부르고 춤도 췄다는 말을 하셨다. 좋다는 말만 하시는데... 내 맘 상할까 봐 또 꾸역꾸역 맘에 드는 척해주셨다. 사실 어떤 신발이 맘에 드시는 건지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알면 더 좋은 걸로 사드릴 수 있었는데... 혼자 걷는 게 불편해 잘 엎어지는 할머니가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시는 편이라 운동화가 조금이라도 더 편하셨으면 했고, 아픈 데가 없는 할머니께 내가 해드릴 있는 유일한 배려였으며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단지 내가 바라는 건, 할머니가 좋은 신발 신고서 매일 기분 좋게 사셨으면 좋겠다 우리 곁에서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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