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깎는 사람의 비애
명절에 사둔 과일을 깎던 나는 갑자기 내 안에서 용광로처럼 뿜어져 나오는 울분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음식물쓰레기 처리할 때를 대비해서 미리 과일을 깎아 넣어두는 습관이 생겼다.
이번 명절에는 다행히 시댁, 친정의 허락하에 방문 일정이 연기되어 아직도 과일 깎는 게 매우 서투른 나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가장 아랫사람으로써 눈치껏 해야 할 일 중 하나일 테니 말이다.
물론 평소에는 음식물 처리를 생각해서 씨 없거나 껍질째로 먹을 수 있는 과일을 선호해서 구입해서 먹는 편이나 가끔은 아는 맛일지라도 명절이라는 분위기에 휩쓸려 색다른 선택을 하곤 한다.
당연히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올라간 물가와 어느 정도의 타협 끝에 선택한 건 '배'였다. 추석명절에는 내려가지 못했으나 조촐하고 간소하게 추석상차림을 마련하기 위한 나의 작은 노력이었다.
그때 올린 배를 편의상 오후에 하나씩 깎아, 저녁에 신랑에게 주곤 했는데 이게 문제일 줄이야...
아니, 그동안 꾸역꾸역 삼켜온 울분이었다.
칼로 열심히 껍질과 분리시키고 과육을 먹기 좋게 잘라두는 것 이외, 과일의 씨를 발라내기 위한 작업. 그건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행위다. 수증기와의 마찰로 점점 진득해지는 과즙이 흐르는 것을 참아가며 뼈대에 붙은 살을 발라먹는 모습. 어쩌면 그것이 나를 위한 방어책이라고 생각해왔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그렇게 과일을 맛보고 있는 내 모습에서 과일 깎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늘 맛있는 부위는 입에 넣어주셨고, 먹기 좋게 잘라서 간식으로 챙겨주셨다. 식후에나 명절에나 늘 변함없이 과일을 잘라 주는 건 항상 할머니였고 엄마였고, 이젠 내 모습이 된 것 같다.
'그게 뭔 대수라고, 과일 깎는 걸로 무슨 비참하고 안쓰럽고 안타까워하는지 모르겠네.'
그러하다. 밥 먹는 것처럼 너무 당연한 게 되어버린 것들.
별게 아닐 수도 있다. 과일을 안 먹으면 된다. 하지만 과일을 먹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닌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과일은 엄마의 몫이었다. 과일은 원래부터 깎아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아무런 생각 없이 주어지면 먹어왔던 음식이었으나 결혼하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니는 깎아놓은 거 먹을 줄만 알제....?"
한때 일한다고 바쁘다며 주말에도 집안일을 별로 돕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몸이 많이 안 좋으셨는지 웬일로 할머니가 쓰디쓴 말 한마디를 홧김에 툭 내뱉었다.
그때는 그게 불호령인 줄 알고 잽싸게 움직여봤으나, 쉽사리 식혀지지 않았던 그날의 기억의 불씨가 아직도 남아있다. 오늘 나는 할머니의 홧김 같은 속 쓰림을 느낀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어머니들은 할머니나 나 같은 마음을 살면서 한 번쯤 느껴보지 않았을까.
'내 자식, 내 손주 먹을 건데 번거롭게 내가 깎아주는 게 낫지.'
이런 마음으로 행해온 삶일 것이다. 아무리 자발적인 선택이고 희생이 됐을지언정, 당연함을 넘어 어머니의 숭고한 마음을 더 먼저 헤아리고 위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뼈대 있는 과일은 대하기 어렵다.
고로 어머니가 전담할 필요는 없다.
뼈대 있는 과일과의 사투는 평등하게
오롯히 과일 깎는 사람의 몫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