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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지협 Jun 09. 2023

내년에는 꼭 제습기 사 드릴게요

용량이 적어 불편해하셨지만 고장 날 때까지 기다렸던 제습기  


할머니께 약속했던 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지금 기억에 남는 건 바로 제습기다. 할머니는 3년째 되면서 겉은 누렇게 변했고 통마저도 자국이 선명하게 남겨진 제습기가 못내 못마땅하셨던 것 같다. 겉모양보다는 자주 물을 빼서 버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양으로 치면 가장 작은 크기인데, 할머니 혼자 생활하시다 보니 그 정도면 된다는 생각으로 구입해 드린 크기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제 몫을 톡톡히 해준 덕분에 작년 여름에도 쉴 새 없이 열 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할머니께... 고장 날 때까지 아니, 올해까지만 쓰시면 내년에는 크고 좋은 걸로 사드릴게요! 그렇게 약속했었다. 그런데 막상 여름이 다가왔는데도 선물을 받아줄 사람이 없었고 의미도 소용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작년에 사드렸음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그런 뒤늦은 후회가 스멀스멀 마음 한 구석에서 비집고 나왔다.


올해가 되고 설날이 지나 봄의 시작을 알리는 3월에 할머니는 쓰러져셨다. 그동안 뇌출혈 수술에 이어 중환 자실, 입원, 요양병원 입소 등 여러 일들이 펼쳐졌다. 아직도 싱숭생숭 얼떨떨하다. 잔병치레는 밥먹듯이 하던 분이셔서 병원 가는 일은 잦았으나, 병원에서 머무는 시간은 몇 시간 내로 하루안에는 꼭 집으로 가자고 재촉하시분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그토록 싫어하던 병원 생활을 하고 계시는 중이라서 나 역시도 낯설다. 할머니는 아직도 인지능력이 돌아오지 못한 상태란다. 며칠 전에 할머니는 뵙고 왔었는데 이번에 뵙은 할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었다.


저번에는 산소호흡기를 끼신 상태에서도 뭔가 얘기하려고 노력해 주셨었는데... 이번에는 할머니의 소리로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으로 된 말은 없었다. 단지... 아~아~라는 한 마디가 전부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건 면회 시간 내내 면회온 사람들을 열심히 살피셨고 쳐다보셨다. (알아보시는 건지는 모르겠다) 말의 중요성을 다시 느꼈던 시간이었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기저귀 습진. 모기의 한 방 역습. 그리고 곧 닥쳐올 것 같은 장마와 태풍의 시간. 그 시간이 어느 때보다도 두렵다 할머니의 건강상태에 또다시 영향을 미칠까 봐... 제발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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