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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괴물 Sep 16. 2016

아날로그적 감수성

시간과 공간을 암살시킨 기차 안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 안.


오랜만에 기차를 타며

아날로그적 감수성에 빠지려고 했는데,

문득 대학시절 강의 시간에 들은 내용이 생각났다.

철도가 처음 생겨났을 때, 그것이

여행의 시간과 공간을 암살시켰다고 주장했던

아날로그 지식인들의 이야기.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여행의 과정 그 자체'인데,

철도가 그것을 단지

"창밖을 스치는 풍경"으로 전락시켜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나마 정감 가는 우리 '무궁화'나 '새마을'도 아닌,

서구의 우월한 기술력을 이름에서부터

티 내고 있는 'KTX'를 타고서도 아날로그라 억지 이름 붙이고 즐겨야 하는 형편이다.


달리는 기차의 창밖으로

아무 향기도, 촉각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많은 것들을 눈에 담으며,

그나마 이렇게라도 세상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요즘은 삶이 주는 시간과 공간의 여운을

즐길 수 있는 순간이 더러 없다.

서글프게도.



이번에 부모님께 스마트폰을 해드렸다.

부모님께서는 기어코 필요 없다고 거부하셨지만,

다른 가족들처럼 가족 카톡방을 만들자며,

그게 참 좋아 보이더라고 설득하고는

억지로 손에 쥐어드렸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엄마 아빠가 귀여울 따름.

편리하겠다는 생각보다

새로운 전자기기에 겁부터 내시는 부모님을 보고,

우리는 정말 기술의 경계에 살고 있구나 했다.


40년 전, 물을 어떻게 돈 내고 쓰냐며

수도세를 무시하던 우리나라였는데,

20년 전, 386 컴퓨터를 학교에서나

겨우 구경하곤 하던 우리나라였는데,

지금은 너도나도 스마트폰 안에

팬티엄 컴퓨터를 넣고 다니는 시대가 되었다.

페르시아 왕자와 고인돌이 아직도 그리운데,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클릭 몇 번으로 전쟁을 하고 농장을 키우며,

그렇게 보이지 않은 세상을 살아간다.

뭔가 먹먹하지만, 어쩔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세상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기분이 묘하다.  

불현듯 달리는 기차가 건네준 감성에 취해서,

기술문명에 대한 내 생각도 기차와 함께 덜컹거리고 있다.



몇 백 년 전 만해도

몇 주를 두고 여정을 꾸렸을 이 길을,

기술의 힘을 빌어 2시간 만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걷다가, 처음 말을 탔을 때 느꼈을 신명.

자동차를 처음 타고 달렸을 때 느꼈을 경이로움.  

그리고 하늘을 나는 무언가를 타고 구름 속으로 사라졌을 때 느꼈을 두려움.  

나는 그것을 두려움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인간의 상상력을 넘어선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훗날 미래에, 타임머신이 나타나고,

순간이동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신기하기보다는 두렵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기술은 꼭 누군가를 살리는 기술임과 동시에 누군가를 죽이는 기술이기 때문에,

그것을 수많은 역사 속에서 보아왔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새 것은 언젠가 헌 것이 되고,

새 것을 헌 것으로 만든 새 것 또한

언젠가는 헌 것이 된다.

게다가 디지털은 그것에 가속도를 붙여 버렸고,

삶의 여운을 느긋하게 즐기려는 사람들은,

발 없이 달리는 기술의 속도에 버거워하고 있다.  


핸드폰에 아날로그 팬을 장착한 삼성의 신무기에 속아서 나는 그나마 아날로그적 사람이라 합리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창 밖으로는 세상의 풍경이

아무 향기도, 촉각도 없이 스쳐 지나간다.  

열차에서 묵묵히 기술문명의 소음을 견디며,

속도를 따라가기 버거운 마음을 한 껏 담아,

삼성의 아날로그 팬으로

두서없는 글을 써대고 있다.


9월의 태양이 유난히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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