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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istgon Oct 04. 2020

알 카포네와 내가 사랑에 빠진 곳

시카고 기살리기 프로젝트- 전설의 재즈바 <그린 밀>

막상 시카고를 떠나게 되니 그동안 나에게 천대받았던 시카고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 시카고 입장에서 참으로 어이없었을 것이다. 이제껏 누구에게서도 내게 받았던 이딴 푸대접은 받은 적 없었을 테니!


사실 시카고는 참 멋진 곳이다. 고풍스러움과 현대스러움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있는 곳으로 시카고를 의인화한다면 교양 있는 집에서 부족할 것 없이 사랑 듬뿍 받고 자란 사람 같다고나 할까? 그런 사람들 옆에 가면 뼛속에서부터 '곰돌이가 그려진 섬유유연제'의 포근한 향기가 풍긴다. 그 향기 속에서는 아무나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안정감과 편암함이 느껴져 가까이하고 싶지만 막상 가까이 가면 나와는 좁혀지지 않는 이질감이 느껴지곤 했는데 시카고가 내겐 그랬다. 


어느 날 정을 주고 싶지 않던 시카고의 거리를 걸으면서 문득 '내 평생 시카고에서 또 언제 살아보겠어?' 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난 없는 여유 속에서 무리를 해서라도 시카고를 야금야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시카고에서의 마지막 챕터는 그렇게 야금야금 다녀 본 시카고 명소를 소개해 괜히 나한테 걸려서 그동안 갈굼 당해 억울했던 시카고의 명예를 살려주기로 결심했다. 이름하야 '시카고 매력 어필 타임- 시카고 기살리기 프로젝트'! 


첫 번째로 소개하고 싶은 곳은 <그린 밀>이란 재즈바이다. <그린 밀>은 우리 동네에 자리 잡고 있던 작은 재즈바인데 사실 이런 훌륭한 재즈바가 그저 평범한 우리 동네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시카고의 쿨함을 방증한다. 


큰 특징이 없어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거기 있는지 조차 모를 평범한 점포들 사이에서 이질적으로 번쩍이는 녹색 네온사인이 시선을 사로잡는 곳, 그곳이 바로 <그린 밀>이다. 


'이런 게 여기 왜 있어?' 싶게 번쩍이는 녹색 네온사인으로 가던이의 시선을 집중시켜 놓았다면, 까맣게 코팅된 유리창은 '신경 끄고 가던 길이나 가시오! 우리는 우리끼리 할 게 있으니까!'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접적으로 들리는 노랫소리는 너무도 매력적이라 발걸음이 쉬었다 가고 싶어 했다. 나의 하루가 비록 <그린 밀> 옆으로 늘어진 오래된 점포들처럼 지루하고 고단한 날일 찌라도 <그린 밀> 앞을 지날 때만큼은 영화 같고 크리스마스 같았다.


중학교 2학년 학교 수련회에서 얼토당토않게  기상곡으로 접하게 됐던 'The Look Of Love', 그 노래가 주는 몽환적인 분위기가 좋아 그 후로부터 재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였다. 서울에서도 유명 재즈바를 들락날락 거리는 것도 모자라 한 때는 재즈가수를 꿈을 꿨을 정도로 내가 사랑하던 재즈!  그래서 더욱 관심이 갔던 <그린 밀>이었지만 쉽게 갈 수 없는 곳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살던 동네는 평범한 주거 밀집 지역이면서도 치안이 썩 좋은 곳은 아닌지라 주민들 사이에 저녁 8시에는 귀가를 해야 한다는 묵언의 법칙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그린 밀>은 저녁 10시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곳이기에 쉽게 갈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린 밀> 입구를 지날 때마다 '주민등록증' 이 나오면 호프집에서 500cc 맥주를 마시겠노라 다짐하는 고등학생 마냥 언젠가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꼭 가겠노라 다짐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꿈이 지인 찬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내가 <그린 밀>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단 이야기를 듣고 지인이 함께 가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린 밀>을 가기로 한 날은 아침부터 하루 종일 좌심실 우심방이 난동을 부려댔다. 


'도대체 어떤 곳일까? 파티복이라도 입고 가야 하나? 너무 비싼 건 아닐까?'


괜스레 혼자 힘주고 갔다가 우스꽝 스러운 꼴이 되진 않을까 싶어 치열한 고민 끝에 옷장 속 몇 없는 옷을 갖고 최고의 차림을 만들어 보았다. 격식 있는 곳임을 고려해 드레스 코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검은색의 내가 가진 가장 최고의 미국 브랜드! 나이키 후드 집업과 나이키 티셔츠, 그리고 나이키 레깅스였다. 레깅스를  입은 엉덩이를 그대로 내놓기엔 천박해 보일 수 있으니 빨간 체크 남방을 허리춤에 묶어 엉덩이를 살짝 가려줬다. 거기에! 뉴발란스 러닝화까지 신고! 의식 있는 젋은이 마냥 '에코백'을 매어주었다. (사실 옷도 없었고 너무 힘주고 가면 오히려 촌스러울 거 같아서 입은 옷이었다.)


입구에는 오다가다 자주 봤던 세큐리티 맨이 서있었다. 그 앞을 지날 때면 괜스레 훔쳐봤다 한소리 들을 거 같아 먼 산을 바라보며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지나갔는데 오늘은 다르다! '난 손님이다!' 당당하게 세큐리티 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오매 오매! 이것이 무엇이다냐?'


문을 하나 두고 내부에선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상상하던 모습보다 더욱 황홀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1940년대 미국에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옛날부터 변함없이 보존되고 있는 내부 인테리어부터 홀을 가득 채운 1940년대 미국에서 유행하던 스윙 재즈 까지! 그곳에선 오직 사람들 만이 현실이었다.


무대 위에는 나이가 지긋한 백발의 노인이 하얀 턱시도를 차려입은 채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그 뒤로는 젊은 남성부터 나이 지긋한 남성들로 이루어진 '스윙 오케스트라'가 다음 곡 연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왠지 저 앞줄에 트럼펫을 들고 앉은 백인의 중년 남성은 낯선 이방 여인과의 뜨거운 사랑 앞에서 어떤 편견도 없지 않을까? 


엉뚱한 상상을 하며 혼자 웃음을 지어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내 눈을 피하기라도 하는 듯 기가 막히게 내 눈빛을 피했다.


'훗- 운 좋은 줄 아시오! 자네 나한테 한 번 빠졌다가 내 매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뻔했어!!'


상상은 자유라지 않던가? 가끔 너무 많은 로맨스 영화를 본 여자는 위험할 수 있다.


무대 위 백발의 노인이 마이크 앞에 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남성의 이야기가 끝나자 사람들의 박수소리를 타고 무대 위로 어여쁜 가수가 등장했다. 가수에게 자리를 내어주곤 무대 밑으로 내려간 백발의 노인이 이제는 지휘봉을 꺼내 들고 지휘를 시작하자 스윙밴드의 연주가 시작됐다. 한음 한음에서 영혼의 꿀이 뚝뚝 떨어졌지만 정작 연주를 하는 연주자들의 표정은 '이 연주만 오늘로써 태어나서 5만 번째 한다.'는 듯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멋졌다. 


음악이 시작되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관객들은 '아하! 내가 나서야 할 차례군!' 하듯 망설임이란 1알 갱이의 소금만큼도 없어 보였다. 앞으로 나온 관객들은 초대받은 댄서들 마냥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들의 춤은 내가 한국에서 익히 보았던 흥 오른 관객들의 춤사위와는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같은 춤을 추고 있었다. 왈츠라고 해야 하나 탱고라고 해야 하나? 낯선 사람과 합을 맞춰 춤을 완벽하게 추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한 춤은 <전국! 노래자랑>을 보면 가끔 흥 오른 관객들이 앞으로 나와 저마다의 몸짓으로 각개전투를 펼쳐나가는 모습이었는데 그들은 사뿐사뿐 합을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어딜 가도 흥이라면 빠지지 않는 나였지만 오늘만큼은 쭈그러져있고 싶어 졌다. 사실 내가 '아싸 가오리!'라고 소리를 지르며 게다리 춤을 춘다 하여도 아무도 나 따위에게 신경도 안 쓸 분위기였다. 모두가 진지하게 본인들의 세상 속을 살고 있는 분위기 가운데 내가 오늘 해야 할 것은 조용한 관람뿐이었다. 


구석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해 보니 그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어떤 이는 방금 전까지 은행에서 손님 접대를 했을 것 같아 보이고, 어떤 이는 방금 전까지 설거지와 집안일을 하다 나왔을 것 같았으며, 어떤 이는 여행자 신분으로 한껏 들떠 이 성지를 체험하러 온 듯 너무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아마 그들은 <그린 밀>의 문을 들어설 때 '이 순간만큼은 내가 주인공이야!'라고 다짐을 하며 그 시간을 오롯이 즐기는 것 같았다. 



그중에 내 눈길을 사로잡은 커플이 있었는데 백발의 할아버지와 화장기 없이 안경을 쓰고 온 젊은 여성 커플이었다. 스텝이 서툴어 실수를 하는 젊은 여성과 그런 그녀를 여유 있는 몸짓으로 노련하게 리드하는 노인의 모습.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여인의 향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된 퇴역한 장교 '알 파치노'가 갓 피어난 새빨간 장미꽃처럼 싱그러운 여인과 춤을 추는 장면. 스텝이 노련한 장교와는 다르게 자꾸만 스텝이 꼬여 수줍어하는 여인에게 장교는 


"탱고를 추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 없소, 인생과는 달리 탱고에는 실수가 없소. 설혹 실수를 한다 해도 다시 추면 되니까 실수를 해서 발이 엉키면 그게 탱고죠." 


라고 말한다. 내가 좋아하던 영화 속 한 장면이 실제로 일어나는 곳이었다. 


'이 곳에선 얼마나 많은 영화가 현실이 되었을까?


실제로 <그린 밀>에서는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다. 100년이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이 곳은 파리의 '물랑 루주(레드 밀)'에서 영감을 얻어 '밀그 린'이란 이름으로 탄생되었으며 미국 시카고 마피아 조직의 두목으로 유명한 '알 카포네'가 주 고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재즈 아티스트 '프랭크 시나트라'와 '빌 게이츠', 그리고 '찰리 채플린'에 이르기까지 유명인사들의 사랑을 받은 곳이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스토리로 가득 찬 곳이었다.


영화와도 같던 <그린 밀>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한 후 클럽의 문을 나서자 녹색빛으로 찬란하던 순간은 빛 바랜 어느 철물점 간판 마냥 건조하게 메말라버렸다. 


집에 돌아와 작은방 한 칸에 내 몸을 누여 찬란한 찰나의 순간을 되뇌어 보았다.


"좋다. 좋았다."


<그린 밀>은 팍팍한 현실을 환기시킬 수 있는 마법의 공간이었다. 한편으로는 여행자가 아닌 거주자 신분의 방문이 주는 이질감도 느꼈는데 그것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흉내 낼 수 없는 부내처럼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미국에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 보더라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 삶이 있는 곳이 하더라도 어쩌면 진짜로 살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순간을 한 번이라도 살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행자 신분이든 거주자 신분이든 시카고에서 당신이 현실을 벗어나 영화 속 한 장면을 오감으로 즐기고 싶다면 시카고의 숨은 명소 <그린 밀>을 가볼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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