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산 알람 시계가 불량이다. 아무리 스위치를 off 쪽으로 내려도 뭔가 용수철 같은 게 잘못 맞물린 것처럼 다시 on 쪽으로 튕겨 올라간다. 시계 배터리를 빼 버려서 아예 생명을(?) 앗아갈까도 잠깐 생각했지만, 그래도 또 필요해서 구입한 물건인지라…….
이렇게 끌 수 없는 알람 시계와의 동거가 시작됐다. 필요한 시간에 알람을 울리면, 꺼지지 않는 스위치를 가지고 씨름하는 대신에 알람 시간을 맞추는 다이얼을 휙 돌려서 소리가 울리지 않게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한 번의 손놀림으로 알람 시간 설정 다이얼을 돌리면 두 시간 정도는 돌아가나 보다. 이게 반복되는 날에는 2시간마다 의미 없는 알람이 울린다. 이 정도면 진작 폐기시킬 수도 있었는데, 난 왜 이 알람 시계를 계속 쓰고 있을까. 알람이 울리면 짜증스럽게 몸을 일으켜서 다시 시계를……, '짜증스럽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이 알람 소리가 그렇게까지 싫지는 않은가 보다. 그다지 짜증스럽지 않았다. 계속 나에게 알람을 울리고 싶었던 건 나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요새 가끔 정신을 놓고 살고 있을 때가 많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기력한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특정한 시기를 빨리 지나 보내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 그대로 '시간을 죽이는(killing time)' 행동들을 곧잘 하곤 하지만, 사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올해 초에 토끼 모양의 작은 장식품을 구입하면서 '왠지 토끼띠인 나의 한 해가 될 거 같은데?' 하는 기분과 기운을 느낀 적이 있다. 뭐든 내 뜻대로 잘 되는 한 해이니, 내가 그 운명(?)에 맞게 움직여주기만 하면 될 것 같은 기분. 그토록 소중한 토끼띠의 한 해인데, 내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허투루 날려 보내고 싶을 리가 없다.
오늘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방황하는 마음'에 가깝다. '이런 감정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지나치고 싶지만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내가 느끼는 아주 소소한 감각들, 잠깐의 생각이나 기분과 같은 모든 것들이 내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 하물며 '감정'의 단계까지 침입했다면 무심하게 깔보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런 감정은 내가 맞닥뜨리고 해결한 적이 있는 감정이다. "붙어 본 상대"다.
나는 연륜이라는 게, '무뎌지는' 방식으로 점점 쌓여가는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마냥 그렇지는 않네, 오히려 더욱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지는 방식으로 쌓일 수도 있는 거였나 보다.이런 감정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오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저 멀리서 슬쩍 숨결만 풍겨도 알아채곤 한다. '아, 왔구나 너.'
언젠가부터는 달갑지 않은 특정한 감정이 찾아왔을 때 한 번도 그걸 외면하지 않게 되었다. 술을 들이붓거나, 여행으로 도망가거나, 충동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등의 회피 행동이 한 방울도 섞이지 않도록 노력했다. 새벽 공기처럼 날카롭게 맑은 정신으로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감정(특히 방황하는 종류의)이 들어올 때는 수면 내시경을 앞둔 사람처럼 쉽게 몽롱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여다보려고 해도 쉽게 잘 될 턱이 없다.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펴 놓고 몇 번이나 읽고, 또 읽고, 다시 집중해서 읽어보고, 조금 있다가 다시 풀어보기를 반복하는 심정에 가깝다.
하지만 이겨본 적 있는 상대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다만 이겨내기까지 그 치열한 과정, 한 라운드 한 라운드를 해내는 동안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그 기억이 생생할수록 링에 오르기 전에 조금 더 깊이 심호흡을 해야 될 뿐이겠지. 이런 경험치가 쌓여서 대미지(데미지, damage)가 아닌 '여유'가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알람시계처럼 나를 정신 차리게 해주는 것들을 주변에 잔뜩 둬야겠다고 생각한다. 진짜 알람시계 수십 개로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사겠다. 물리적인 날벼락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겠다. 꾸준히 해오고 있던 운동도 더욱 박차를 가해야겠고, 언제부턴가 조금 '재미없게 해내고 있던 재밌는 일들'도 다시 한번 그 재미에 집중해 봐야겠다. 가끔은 '정신 차리기 위해 정신 없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