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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인 한유화 Sep 13. 2023

자신 없는 기분은 더러워, 서러워

내가 선택한 삶에 자신이 없다면,

초등학교 음악 시간을 위해 문구점에서 묶어 파는 악기들이 있었다. 그저 뚱땅거리고 뚝딱하면 소리를 낼 수 있는 캐스터넷츠, 트라이앵글의 시기는 금방 지나가고 약간의 호흡이 필요한 리코더와 멜로디언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리코더로 애니메이션 <개구리 왕눈이> 주제곡 정도를 겨우 불 수 있을 쯤에 세상에, 아직 준비되지 않은 단소의 시대가 찾아왔다.


한국 전통 관악기인 단소.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기분을 묘하게 가다듬고 입술에 기이한 긴장을 주어야 하는 고난도의 악기. 그렇기에 단소를 빠르게 장악한 어린이는 건방을 떨며 주변 친구들을 조롱하듯 실력을 뽐내고자 하는 강렬한 유혹에 빠진다. (그 유혹을 잘 제어하지 못했다가는 단소를 무기로 활용하는 포식자 친구들이 시건방에 대한 죗값을 받아갈지도 모른다.)


단소는 묘하게 사람을 긴장하게 한다. 어쩌다 운 좋게 소리 내는 걸 성공하고 나면, 그 순간의 입술 모양과 자세와 각종 컨디션, 징크스를 동일하게 유지해야 다음번에도 소리를 낼 수 있다. 생각 없이 입술에 립밤이라도 발랐다가는 돌이킬 수가 없다. 나는 입술이 조금만 미끌거려도 소리가 안 나는데 이상하게도 실력자 친구들은 코에 꽂아도 소리가 날 것처럼 자신만만 여유롭다.


'과연 오늘 단소의 신은 나의 편이 되어줄 것인가.'

반 친구들의 시선이 모이는 교실 앞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이 아주 갯벌이다. 하필 바로 앞 순서의 친구는 오늘따라 왜 그렇게 잘한 거야. 나는 초라하게 바람이 새나가는 치욕적인 소리만 들려주다가 실기평가 빵점을 받을 것만 같다. 이미 두 발은 도착했고 두 손도 가지런하다. 입 모양도 조촐하게 모아놓았지만 내 마음이, 내 기분이 안 켜진다. '하기 싫어. 하기 싫다.' 자신 없는 걸 해야 할 때의 기분은 더럽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게 시간이 나를 재촉하기 시작하면 더러운 기분은 서러운 마음이 된다.






내가 선택한 삶에 자신이 없어질 때,

나와 맞는 가족형태로서 '1인 가정'을 선택했다. 대다수와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되면, 그 선택의 근거나 계기에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순수한 호기심이 아닌, '언젠가 후회하겠지.' 하는 못난 마음을 포함한 경우도 많다. 다수에 속하지 않는 삶은 자연스럽게 '편 먹고 달라드는 싸움'에서 대체로 불리해진다. 특히 결혼을 둘러싼 선택에 대해서는 더 그런 것 같다. 수많은 나라가 각각의 팀으로서 참가하는 올림픽 같은 싸움이 아니라, 청군 아니면 백군이 되어야만 하는 운동회 같은 싸움이 되기도 한다.


전교생을 세워놓고 하는 O/X 퀴즈 같기도 하다. 나는 그저 X 자리에 쭉 서 있을 뿐인데 X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O로 옮겨간다. O에 서 있다가 X로 넘어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게 느껴진다. '나 계속 여기 서 있어도 되나? 이거 맞나?' 하는 망설임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내가 틀린 거 아닌가 싶은 기분.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자신 없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자신 없는 일을 해야 하는 기분은 더럽다. 슬그머니 회피하고 싶어지는 건 그나마 낫다. 와장창 내던지고 도망가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이나 가족에 대한 결정을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도 없다. 그걸 나 자신이 제일 잘 알지만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재촉한다면 '이 때다' 하고 발끈한다. 단소를 내던지며 음악실 문을 박차고 나온다.






실험을 할 땐 자신이 없는 게 자연스럽다.

인생에서 영원한 성취는 없는 법. 성취로 보이는 어떠한 영광의 순간의 앞뒤에는 온통 실험의 나날들이 꽉 차 있다. 어제까지 해 놓은 삶에 오늘의 변수를 더해서 하루하루의 자신을 관찰하고 알아간다. 잔뜩 가설을 세워놓고 이런저런 실험을 하더라도 결과를 금방 얻기는 어렵다. 인생의 한정적인 자원들을 거의 다 써버렸을 때가 되어서야 그나마 조금 갈피가 잡힐까 말까 할 정도. 그 과정에서 운 좋게 발견한 작은 것으로부터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만들어 낸다.


말 그래도 '인생을 걸고' 하는 실험. 만약 실험의 끝에 가서야 내 가설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된다면?

결혼하지 않는 인생 계획을 갖고 1인 가정으로서 살아가는 선택. 그 선택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번복할 수 있고, 갑자기 결혼을 하거나 함께 살 가족을 꾸릴 수도 있다. 하지만 '특정한 시기'에 대한 실험은 다시 할 수가 없다. 어떤 연령대에 결혼을 하고 가임기 이전에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일들 말이다.


자신이 없어도 해 나가야 하는 삶에 대한 반항심을, 소수의 인생을 사는 서러움인 줄로 종종 착각하기도 했다.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우리 비혼들끼리만 공감하는 무언가'가 있는 척하며 힘주어 굵은 선을 그어 놓고 나는 소수의 무리 안쪽으로, 안쪽으로 자꾸 후퇴해 들어간다. 하지만 그럴 때의 나는 사실 조금 연약한 상태였을 뿐이었다. 자신 없는 스스로가 싫은 마음, 자신 없는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은 마음은 곧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지 않은가.


꼭 잘 해내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때 그 앞에서 가끔 움츠러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기 싫어서 기분이 더럽고 서러우면 차라리 욕하고 울어버리자. 누군가가 '이렇게 떼를 쓰고 어리광 피워봐야 소용없지 않나.' 하고 말한다면, 실컷 꼬장을 부려서 가뿐해진 나의 마음에 용기를 새로 채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 지금의 자신이 이런 가설을 세우고 이런 실험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믿어봐도 좋다. 새로운 실험은 항상 그전까지의 실험에서 알게 된 것들을 기반으로 한 '진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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