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인 한유화 Oct 08. 2023

혼삶은 명절을 지나면서 더 성숙해진다.

혼삶도 성묘가 즐거운데,

웬일로 이 시골길에 차량 통행이 잦다. 운전해서 지날 때는 그저 배경처럼 스쳐가곤 했던 이산 저산에 성묘를 하러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니 추석 명절인 게 실감 난다. 할머니는 큼지막한 배 한 알을 꺼내 들고 슥슥 껍질을 깎아서 집안의 어른들이 챙겨 온 송편과 전을 담은 다회용 접시 위에 툭툭 썰어 놓으시고. 할아버지와 삼촌들은 산소 주변에 소주를 뿌리며 각각 분주하다. 지난주에 미리 와서 벌초를 하고 갔다는 막내 삼촌은 산소 주변을 정비하기 위해 부지런히 둘러본다. 어느새 과일을 잔뜩 깎아놓은 할머니는 그 야무진 손놀림으로 둥근 봉분 위에 자라난 잡초를 쉴 새 없이 뜯는다.


삼촌들을 따라온 숙모들, 사촌동생들은 되려 할 일이 없어 심심하다. 달라붙는 모기를 쫓아내고 주변 풍경을 한 번씩 살피면서 되도록이면 ‘너무 티 나는 딴짓’을 하지 않으려 애를 쓰기도 한다. 중어중문학과 출신인 나는 묘비에 적힌 한자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낸다. ‘000파의 몇 대 손’이라는 주요 정보는 봐도 봐도 생경하게 느껴진다. 외할아버지를 이어서 장남 역할을 해야 하는 큰삼촌도 내 옆에서 열심히 묘비를 보며 무언가를 수첩에 기록한다.


가문의 산소가 모여있는 이곳을 조성하고 정돈하는 것은 이 집안의 대표적인 공동 프로젝트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 가족들이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다. 이 산의 소유자와 장소 사용에 대한 분배를 주도하는 누군가가 따로 있고, 제의식을 관장하는 누군가와, 실제 시공 및 현장관리를 맡는 누군가가 있다. 이 프로젝트를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한 ‘인사(HR) 기획’의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족보’이다. 원칙대로라면 어느 집 족보에도 적히지 않는 딸로서, 여자로서의 나. 그 거리감만큼이나 성묘의 시간은 더디게 간다.






가족 안에서 부담스러운 의무를 짊어지는 것의 부정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1인 가구인 가족 구성원이 집안의 프로젝트에서 소외되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혼삶은 명절 때 숨 죽이고 있다가, 다른 순간에 다른 영역에서만 집안과 가문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일까? 대를 이어서 역할을 수행할, 소위 ‘후임’을 양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일까?


나는 서울이 고향인 내 친구들로부터 ‘선산’을 물려받거나 벌초를 하러 가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지역과 문화권에 따라 공동 프로젝트의 내용이나 중요성은 천차만별. 집집마다 저마다 다른 가치관과 문화를 지니고, 그 수만큼이나 다양한 명절 풍경을 만들어낸다. 다양한 가족 형태가 조금씩 더 안정될수록 우리는 더 창의적인 역할 분배와 대안을 찾아낼 거라고 믿고 싶다.


1인 가구가 많아지면서 무조건적으로 기존의 명절 문화를 축소하거나 소멸시키는 방향으로만 흘러간다면 그 또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까지 명절 음식을 손수 차리는 남자분을 본 적도 없고 앞장서서 벌초하고 성묘를 나서는 여자분을 본 적도 없지만, 여러 명의 1인 가구가 모여서 이러한 여러 가지 ‘명절 운영’을 논의하는 것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은가?


가끔씩 혈연가족이 아닌 다른 형태의 가족들과 함께 하는 명절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토록 즐겁고 훈훈한 명절을 함께 하는 동반자들에게 ‘유사 가족’, ‘대안 가족’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 달갑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반드시 물리적으로 모여 지내는 명절이 아니더라도, 명절을 명절답게 하는 것들을 소중히 하고 즐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혼삶의 명절 풍경이 보다 더 다채롭고 풍요로워지길 기대해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