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으로 친해지고 막걸리로 더 친해지고
등산을 했다.
원래는 그와 그의 절친인 규암씨의 금오산 행에 낄 계획이었다. 며칠 전 그의 동아리 친구와 연락이 닿았는데, 마침 주말에 남자친구랑 둘이 금오산에 갈 계획이란다. 그래서 그냥 다섯명이서 다 같이 가기로.
일요일 이른 여섯 시, 생각보다 좋은 컨디션으로 일어난 나는 콩맨과 함께 동대구복합터미널로 향했다. 역사 안의 이삭토스트를 사서 부산에서 버스를 타고 온 규암씨를 만나 동대구역으로. 카페에서 블루베리요거트스무디만 마신다는 남자에게 우리가 미리 편의점에서 사둔 덴마크드링킹요거트를 쥐어주며 기차에 오르기 전 토스트를 나누어 먹었다.
기차 안에서 기절한 듯 잠이 든 지 30분, 구미역에 도착했고 그 앞에서 우릴 기다리던 태관 & 설 커플
(이하 태설)을 만났다. 다섯 명의 묘한 조합. 콩맨의 절친인 규암씨는 친구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러나 서로 처음 만난 사람들. 참 나는 이 사람들을 두 번째 보는 거였다. 규암씨는 지난 앞장에서 주차 앞장이로 활약해주었었고, 태설은 전전 앞장에 놀러 와서 인사를 나누었었다. 규암씨와 태설은 잘 아는 듯하지만 알고보면 초면인 사이.
태관친구 차를 타고 9킬로여를 달려 산행의 들머리인 금오랜드에 도착했다.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린 후 올려본 하늘은 맑고 산은 깎아지른 듯 험준하면서도 멋있어 보였고, 우리는 약간의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금오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굉장히 잘 닦여져 있던 등산로. 초입에 성문이 하나 나왔는데, 워낙 흘림체라 다들 못 읽은 성문의 현판엔 '大惠門(대혜 문)'이라 적혀있었다. 왜적을 막아 낼 수 있었으니 은혜를 입었다 생각해서 붙인 건지 '크게 은혜를 입은 문'이라는 뜻의.
완만한 오르막길을 1킬로여 걷다가 대혜폭포를 마주했다. 떨어지는 물이 튀긴 자리가 모두 얼어붙어 장관을 이루던. 그런데 금오산은 아이들이 많이 오르기에 신기했다. 이 동네는 등산 조기교육을 시키나 하면서. 더 신기했던 건 슬리퍼를 신고 등산을 하는 어린이를 두 명이나 본 것. 위험해 보였는데 등산의 달인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커플 사이에 낀 규암씨는 가장 먼저 오르고 제일 먼저 내려갔다. 하산할 때 "날쌘돌이씨는 벌써 가고 안 보이네." 했더니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있는 사람 투명인간 만든 거 나야 나ㅋㅋㅋㅋ 우릴 뒤따라오던 태설이 보이지 않을 땐 설 친구가 쓰고 온 모자의 방울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 일명 암호 이즈 솔방울. "솔방울 온다. 이게 가자"
정상을 단 50m 남겨두고서, 남해 보리암을 떠올리게 하는 약사암에 도착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절. 그곳에서 해우소도 들리고 절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스위트아메리카노도 마시고 그리고 규암씨가 기다리고 있을 정상으로 : )
정상에 당도하니 지독한 칼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상상 이상으로 춥고 바람이 매서웠다. 사진은 거의 찍는 둥 마는 둥 하고, 바람을 피해 바위 뒤에서 바나나와 초코팝콘, 그리고 대망의 하이라이트 맥심커피를 마셨다. 평소 믹스커피를 전혀 먹지 않는 나인데 해발 976m 고도 정상 위에서 먹는 그 맛은 어찌나 좋던지. 오늘의 음식들이 생각나서라도 또 산을 오를 것 같다.
기념으로 남길 단체사진을 몇 컷 찍은 후, 드디어 하산길.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도 훨씬 더 길고 험난했다. "이 길을 우리가 올라왔다고? 대견해. 칭찬해 우리." 셀프칭찬을 하면서 3.3km를 내려왔고, 금오랜드 주차장에 도착하고야 마침내 오늘의 산행이 종료되었다.
이제 우리를 기다리는 건 막걸리와 파전. 설 친구가 미리 찾아온 '선녀와 나무꾼' 대신 어느 식당 밖에 쓰여진 닭도리탕 네 글자에 이끌려 '산 따라 물 따라'에 들어섰다. 해물치즈파전으로 에피타이저를, 닭도리탕으로 본격 먹방을. 기대가 컸던 금오산막걸리도 함께. 금오산막걸리는 어쩐지 금오산을 닮아 청량감이 크고 탄산이 셀 것 같다는 내 예상을 그대로 적중했다.
술을 못 마시는 태관 친구는 사이다를 술처럼 받고 나머지 넷은 금오산막걸리 세병과 은자골막걸리 한 병, 조껍데기술 한 주전자를 기울이며 오늘 등산의 회포를 풀었다. 이로서 '등친막친(등산으로 친해지고 막걸리로 더 친해진 사이)' 또는 '선산후막(산 오르고 막걸리 마시기)' 결성!
이제 각자의 자리인 대구로, 김천으로, 부산으로, 서울로 돌아갈 시간. 우리의 대구행 기차나 규암씨의 부산행 버스가 한 시간 반 남짓 남아 그사이 스타벅스로 향했다. 여전히 기프티콘 부자라 본인이 쏜다는 콩맨. 블랙그레이즈드라떼(나) 해피치즈모카(콩맨) 시그니처 초콜릿(규암) 바닐라라떼(설) 화이트모카(태관)를 마시고_쓸데없이 좋은 기억력_등산의 마무리를 한 뒤 콩맨과 나는 구미역, 규암씨는 구미버스터미널로.
그동안 커플로, 단체로 등산을 꼭 해보고 싶었는데 오늘 이루었다. 비록 솔로인 규암씨가 홀로 였다는 게 아쉽지만(그래서 더 날쌘돌이였던 게 아닌가 싶다). 다음엔 우리가 김천으로 가서 황악산에 같이 오르기로. 등산과 막걸리와 사람들로 채운 일요일 참으로 알차디 알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