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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원 Sep 15. 2020

"양쪽으로 여십시오"

무심하게 흘려보내지만 무의미하지 않은 날들에의 기록


지금껏 오른 산


나는 목표지향적인 사람이 아니다.

학창 시절 점수나 등수에 연연하지 않았고

기록재는 것, 경쟁하는 일을 싫어한다.

한번은 고3 때 담임선생님이 반 아이들 전체를

'자신이 예뻐하는 주관적 학생 순위'를 A~F 등급으로 매긴 후 당당하게 알려줌에 분노해 그 당시 실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부모님들께, 학교에 말하고 교육청에도 고발할 뻔 한 적이 있다.


등산을 좋아하지만 정상 정복 또는 나 몇 좌 올랐다는 것 따위엔 관심이 없어서 등산하는 사람들은 열이면 열 다 한다는 블랙야크 100대 명산 인증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쓰담쓰담(친환경 등산 크루) 멤버들이 정상에만 서면 수건 들고 인증하길래, 엉겁결에 따라서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증하게 된 게 서너 군데. 그런데 문득 내가 실제로 몇 군데나 산을 올랐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100대 명산 지도를 찾아 표시해봤더니 딱 10개 산을 올랐더라 지금껏. 생각보다 많이 올랐네. 한가지 아쉬운 건 울릉도 성인봉이나 제주도 한라산은 다시 가서 인증하긴 쉽지 않은데 어쩌나 싶은 것.


주황색으로 표시한게 올랐던 명산. 10/100






걷는 일


신청했던 옥스팜 워크* 패키지가 택배로 도착했다.

*옥스팜 워크란? 지구 반대편 빈곤층 여성들이 깨끗한 물을 구하기 위해 매일 걷고 있는 생존의 거리(10km)를 간접적으로 체험해보는 프로그램이다. 상자를 열어보니 아주 분홍분홍한 아이템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배번호, 완주증서, 스포츠 타월, 비누, 마스크와 마스크케이스, 스티커. 10월 10일까지 내가 있는 어디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비대면 워킹을 함께 할 수 있다. 언제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옥스팜 워크에서 추천하는 인제로 결정. 다가오는 내 생일을 맞이해서 소양강 둘레길 1~3코스를 모두 걷겠다고 다짐했다. 처음으로 1박 2일 둘레길 트레킹을 혼자서 할 수 있겠단 생각에 잠시 들떴다가 남편에게 예고하고 "혹시 같이 갈래?" 했더니 마지못해 동행하는 척 그가 답했다.


원해서 가는거 맞나요



이번 주말의 비슬산 산행도, 가장 좋아하는 달 십월의 둘레길 여정도 벌써부터 기대돼서 콩닥콩닥.


한달 후 걸을 길 예습


핑크컬렉션인가(...)






느슨한 연대를 해나가자


이번 달 책모임에서 읽던  「Uncontact(언컨택트) 」 를 3주차인 오늘 마지막 장을 덮었다. 현시대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코로나를 직격탄으로 맞은 자영업자인터라 술술 읽고 비즈니스적인 부분에서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오늘 읽은 3장 '공동체'를 다룬 부분에 가장. 언컨택트 트렌드는 연결의 단절이 아니라 계속 연결되기 위해서 선택된 트렌드라는 것. 따라서 접촉으로 인하여 우리를 위험하게 만드는 "어떤" 것들에 대비하면서도 여전히 서로에 대한 관심과 소통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일종의 '느슨한 연대'를 지속해야만 한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었는데 더 시기가 앞당겨지고 속도가 빨라졌을 뿐이다. 이미 시작된 언컨택트 사회, 우린 그 속에서 계속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고추튀김과 오징어튀김을 사온 사장님.                                                덕분에 아침부터 배에 기름칠 제대로 했다.






그 사장에 그 손님들 같으니라고.


예리하기도 예민하기도 한 나. 외부 자극에 받는 감정의 소모가 엄청나다. 가까운 사람들로부터의 칭찬이나 애정은 필요로 하나 내가 모르는 사람들로부터의 지나친 관심이나 시선은 싫어한다. 그래서 내가 인싸인 듯 자발적 아싸이고, 관종인 듯 안관종이라는 것. 어쨌든 브런치를 제외한 모든 SNS를 다 끊었고. 내 일상과 브랜드를 같이 녹여서 사용해오던 인스타 계정에 한 달에 한번 공구 오픈 외엔 소식이 거의 없으니 사람들이 궁금도 하겠지. 알면서 애써 외면하고 지금의 도시 속 무인섬 생활에 아주 만족하며 지내고 있었다. 언컨택트 책에서 말한 '도심 월든'과도 비슷하다. (도심 월든 ; 고립된 산속이 아니라 도시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그렇게 지속해오고 있는데 요 며칠 갑작스레 주문과 손님이 증가했다. 그 손님의 대부분은 거의 브랜드 초창기 때부터 함께 해온 분들. 조용히 간헐적으로 주문을 하신다. 기프티콘을 보낸다거나 손편지를 내미신다거나 뜬금없이 밥 사주신다는 분도 계신다. 인풋이 있어 아웃풋이 있는 건데 인풋 없이 일어난 건 정말 우연히, 단지 '생각이 나서'. 그 사장에 그 손님들 같으니라고. 아무튼 오늘은 오랜 손님 한분이 안부를 묻더니 "사장님 추석선물세트 하세요...? 해주시면 안돼요?"하고 간청하셨다:') 일대일 맞춤형으로 세심하게 해드렸다. 이렇게나 조용한 사장에 만만치 않게 조용한 손님들. 표현은 잘 못해도 항상 마음 깊이 감사합니다.


평택 사는 오랜 단골 H님. 이제 막 취업한                                             사회새내기가 이런걸 보낸다 못살아ㅠㅠ






한나절 같은 반나절


부산 가자 광안리 가자 줄곧 노래 부르던 그녀들과 결혼식 이후 처음 셋이 만났다. 코로나 시국이니 타지로의 여행은 접어 두고, 대구지만 대구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으로. 연차는 부담되니 반차를 쓰고 두 사람이 앞산으로 왔다. 차는 내가 몰고 가창으로 향했다. 험난한 오프로드 길을 4-50분간 달려 최정산 자락에 있는 카페 대새목장에 도착. 구름 짙은 하늘과 드넓은 초원을 배경삼아 차를 마셨다.


비록 보고 싶던 전시회나 느낌있는 편집샵 구경은 못했지만 각자의 일과 건강(임산부의 건강, 손목질환자의 건강, 갑상선 수치 높은 자의 건강), 결혼이나 출산육아, 코로나 시대의 정부와 국민의 역할, 음주운전이나 성범죄에 대한 공분 등등 스펙트럼을 광범위하게 넘나드는 대화들로 충분한 시간이었다.


가끔씩 이어지는 침묵이나 멍 때림도 결코 어색하지 않는 상대들이라 좋았다. 점심시간에 운동장 트랙 같이 돌고, 툭하면 쌤들 성대모사하고 놀리기 일쑤고. 야자시간이면 학주 몰래 담장 너머로 꼬치 시켜 먹던 철부지 여고생들이었는데. 십 대에 만난 우리가 이십 대가 지나 삼십 대를 함께 보내고 있는게 신기하다.


일몰이 아주 멋질 거라고 자부하며 내가 데려간 앞산 해넘이전망대에서는 비록 노을 대신 흐림을 마주했지만. 30대 들어 다들 체력이 쇠퇴했는지 반나절 보내 놓고 한나절 함께한 느낌을 받았을지라도. ("오늘 왜 하루종일 갑상선 약 안먹는데!?" 두 끼 약 다 챙겨먹은 친구를 오해하고 혼냈다.) 어쨌든 오랜만에 그녀들과 보낸 시간은 더할 나위 없었다.



하늘도 저수지도 초원도 다 예뻤다




우리는 일상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곤 한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무심하게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도 우리의 무의식에는 숱한 감정이 떠다닌다. 그는 뭇사람들이 예사로 넘기는 매 순간을 작품에 담아낸다. 그의 작품이 때론 슬프기도 부끄럽기도 위안이 되기도 숭고하기도 한 감정이 이는 것은 그의 작품 속에 존재하는 그 순간이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작가 김길후에 대한 캡션 내용 중







bgm. 9월 15일 - 버블시스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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