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일본 소설은 왠지 분위기만 풍기는 느낌이라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에쿠니 가오리의 <도쿄 타워>는 독서 모임에서 선정된 책이기도 하고 또 얼마 전 다소 무거운 책을 읽었던지라 가볍게 보면 되겠다 싶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모임에 나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되나 싶을 정도로 별 감흥이 없었으나,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등장 인물들의 심리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었고 나름대로 상당히 매력적인 책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갓 스무살 청년들인 토오루와 코우지, 또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서른이 훌쩍 넘은 유부녀 시후미와 키미코. 주인공 격이라 할 수 있는 이들 뿐 아니라 다른 인물들의 캐릭터들도 하나씩 따져보니 참 재미가 있다.
우선 토오루. 소극적인 것처럼 보이나 본인만의 세계가 있는 듯해 보이는 조용한 청년으로 묘사된다. 토오루는 17살에 엄마의 지인인 시후미를 만나게 되는데, 이후 토오루의 세계는 온통 시후미의 것들로 가득차버린다. 시후미가 좋아하는 음악, 책, 공간.... 등등
밥을 먹을 때도, 친구를 만날 때도 토오루는 거의 늘 시후미를 생각한다. 그녀는 토오루에게 절대적인 신이자 어머니, 여자, 친구 그 밖에 모든 것이다. 책 속에서 시후미는 토오루의 눈에 비친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등장인물들 중 시후미가 가장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마 많은 여성 독자들이 토오루와 같은 남성 캐릭터에 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정확히 들여다보면 토오루가 보는 아름다운 시후미의 이미지가 되고 싶다라는 욕망에 의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여하튼 후반부로 갈수록 토오루가 안타깝게 여겨졌다. 수동적으로 시후미의 모든 걸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얻는 토오루. (그가 말한대로 시후미는 그에게 편안한 '방'과 같다.) 시후미는 토오루에게 아무때나 연락해도 된다. 그런 네가 좋다. 라고 말했으나 토오루는 언제나 기다리는 편이다.
그와는 반대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어떤 걸 즐기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 같은 시후미. 토오루와의 관계를 주도하는 건 늘 시후미였다.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시후미. 욕심도 많고 호기심도 많은, 그러면서도 어느 한편으로는 굉장히 어른스러운 시후미. (그렇게 보이는 그녀에게도 무언가 허점이 있지 않을까. 우선 토오루를 보고 나서 시후미를 보자.)
그렇다면 토오루는 왜이리 수동적일까.... 단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일까. 타고난 성격, 20대 초반의 나이, 사랑에 빠져버린 상태를 고려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작가는 토오루의 부모님에 대해 상당히 많은 양의 페이지를 할애했다. 그의 어머니는 커리어 우먼으로 토오루는 집과 함께 방치되어 있었고 (그러나 토오루의 집은 이상하리만큼 깨끗하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 사람이 사는 집 같지 않게 잡동사니가 없다.) 결국 부모님은 이혼했으며, 토오루는 어머니를 부정하고 아버지를 불쌍히 여긴다. (시후미의 말을 빌리자면) 현재 그는 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나 함께 살아가고 있지는 않다. 가끔 아버지를 만나긴 하지만 아버지와는 어정쩡하게 떠있는 관계처럼 보인다.
이런 가정환경을 고려하여 추측(?)해보자면 토오루는 어릴적 부모와의 건강한 애착관계를 갖지 못했고, 아이에게는 이 세상 전부와 다름없는 '엄마'라는 존재가 부재했으며, 그로 인해 그는 무언가 텅 빈 듯이 살아오던 중 시후미를 만나면서 그 빈 공간을 그녀로 채우게 된 게 아닐까.
책의 후반부에서는 마냥 기다리기만 하던 토오루가 용기를 내어 시후미에게 한 발 다가선다. 늘 시후미의 공간에 일방적으로 편입했었던 그는 아버지의 사무실을 빌려 그의 공간으로 시후미를 이끈다. 이런 토오루의 모습에 시후미는 적잖이 당황하지만 그의 시도를 받아들이고, 그녀와 더 많은 시간 함께하기 위해 그녀가 운영하는 상점의 직원이 되겠다는 그의 제안도 수락한다.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토오루. 그가 앞으로 시후미와의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켜나갈지, 아니 그보다 자신만의 삶을 어떻게 찾아나갈지 궁금해진다.
반면 그와 만남을 갖지만 정 반대선상에 놓여있는 것 같은 시후미를 살펴보자.
딱 잘라놓고 한 문장으로 이야기하자면 시후미는 '바람을 피고 있는 30대 유부녀'이다.
흔한 막장 불륜 드라마 속 여주인공 캐릭터와는 달리 그녀는 문화와 예술을 즐기는 고상하면서도 통통 튀고, 외적으로는 갸날프고 청순하여 마다할 남자가 없을 것 같은 완벽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아들 뻘 되는 남자애와 바람을 피면서도 남편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그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않고 당당하게 행동한다.
처음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뭘 좋아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 같은 시후미의 성격이 굉장히 주체적이고 이상적으로 느껴졌다. (도덕적인 잣대는 제외시켰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 중 가장 안정적이고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시후미의 이면은 그녀도 눈치채지 못할만큼 흔들리고 있던 게 아닐까.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해.
시후미의 대사는 그녀의 남편과 토오루를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함께 살고 있는 남편, 또 함께 살아가고 있는 토오루.
그녀는 남편과 함께 살고 있지만 그와 특별한 무언가를 공유하진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과의 관계를 부정하거나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일상은 모든 게 가지런히 제자리에 놓여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토오루는 가끔 그녀의 일상에 특별함을 주는 것 같다.
시후미는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이다. 또 욕심도 많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취하고자 노력한다. 책에서 언급되진 않았지만 그녀는 현실과 이상, 일상과 특별함, 안정과 불안정.. 이 중간 어디에선가 균형을 잡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균형을 잡고 있는 척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걸 해나가면서 만족감과 행복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시후미와 비슷한 연령대인 키미코는 어떨까.
키미코는 토오루의 친구, 코우지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 사이이다. 돈많은 유부녀인 키미코와 20대 청년인 코우지는 서로 쿨하게 적당한 관계를 유지해나간다. 코우지는 공식(?) 여자친구도 있고, 여자에 관해서는 굉장히 개방적이다. 키미코는 자칭 성실한 주부로, 둘은 필요한 때 만나곤 한다.
그러다 키미코는 점점 마음을 주지 않는 코우지에게 불만을 갖게 되고 그와의 애매한 관계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 급기야는 이별을 고한다. 코우지는 이런 변화를 미리 감지하고 있었다. 그동안 한 여자에게만 마음을 주는 게 아니라 이 여자 저 여자 만나온 그는 이번에도 비슷하려니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즈음 요시다라는 옛 동창과 조우하게 되면서 그는 큰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요시다는 학창시절 잠시 썸(?)을 탔던 여자애인데, 당시 코우지는 그녀의 엄마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이 연상 여자와의 사랑은 트라우마로 남아 이후 코우지의 무의식에 종종 떠오르곤 한다.
코우지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라는데, 이와 같은 가정 환경은 편모 가정에서 자란 토오루와 대조를 이룬다. (사실 가정 환경으로 캐릭터를 단정 짓는 건 무리가 있지만 작가가 등장 인물들의 성장 배경을 간간이 언급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얼핏 보기에 코우지는 원만한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한 듯 보이지만, 특별한 '결핍' 없이 자란 그에게도 문제는 있어 보인다. 인맥 좋고 권력 있는 아버지 덕택에 졸업 후 취업도 걱정이 없지만 정작 코우지는 뚜렷하게 원하는 것 없이 방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자 관계에 있어서도 오는 여자 가는 여자 딱히 막지 않는 타입으로 본인의 생각대로 사는 자유로운 영혼인데, 요시다의 등장으로 인해 코우지의 삶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위에 언급했듯이 요시다의 등장, 키미코의 결별 선언, 여기에다 여자친구와의 이별까지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사건들로 인해 코우지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혼란에 빠지게 되고.. 급기야는 키미코에게 미련이 남아 그녀를 찾아가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한다. 그동안 그는 연인 관계에서 항상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적이 없었음을 깨달은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코우지의 성격 형성에 '결핍'이 없는 성장 배경도 한 몫 하지 않았나 싶다. 거기에 능청맞고 귀여운 막내 아들 코스프레는 진짜 자신이 원하는 걸 찾지 못하게 한 데 일조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연이지만 주연급(?)으로 영향력을 미쳤던 요시다를 살펴보자.
사실 그녀의 심리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냥 넘어가기엔 섭섭한 캐릭터이다.
자신과 썸을 탔던(?) 남자애가 엄마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다는 것, 또 상황이 종료된 이후에도 자신의 어머니는 그 남자애를 잊지 못한다는 걸 알았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는 감히 상상하기 힘들다.
그녀는 성인이 된 후 우연히 만난 코우지에게 정말 막 들이댄다. 그와 잠자리를 하고픈 의도를 은연 중에 풍기는데.. 다소 미친 여자(?)같은 행동을 하는 요시다는 도대체 왜 그런걸까...
엄마보다 훨씬 어리고 또래인 자신을 두고 엄마와 사귀게 된 코우지. 그녀는 그 뿐 아니라 자신의 엄마도 증오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엄마에게 밀렸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 같고.. 엄마와 헤어진 후에도 자신의 가정에 영향을 주었던 코우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심리가 중첩되고 증폭되어 만약 코우지와 관계를 맺는다면, 이런 모든 상황을 종료시킴과 동시에 엄마에 대한 질투, 코우지에게 호감을 가졌었던 자신의 감정, 그와 엄마에 대한 증오심, 이 모든 것들을 풀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여하튼 극 중 인물 중 가장 난해한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해두자.
토오루와 코우지는 '미완', '수동적', '방황', '성장', '불완전함' 등의 단어들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 같다. (둘의 성격이나 가정 환경은 대조적이지만 그들을 꿰뚫는 단어는 비슷하다.)
이와는 반대에 놓여 있는 시후미와 키미코는 '어른스러움(겉보기에 비교적)', '능동적', '모순' 등의 단어들이 어울릴 듯 하다. (그녀들의 성격은 물과 불처럼 대조적이나 공통된 점을 뽑을 수 있겠다.)
두 청년들은 책의 후반부에서
이제 막 자신만의 무언가를 찾기 위한 갈림길에 놓였고,
그녀들은 청년들을 만남으로써
완벽하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삶 안에서의 '모순'에 직면하게 되었다.
네 명의 남녀를 살펴보고 나니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지만 남과 여 2명씩의 캐릭터들로 여러 단어들을 표현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떠올랐다. 에쿠니 가오리의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밀란 쿤데라 식으로 몇몇 단어들을 활용해 뽑아보니 그냥 술술 읽고 마는 것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마지막으로 <도쿄 타워>, 책 중간 중간 다양한 상황과 배경에서 바라 본 도쿄 타워의 모습이 언급된다. 똑같은 도쿄 타워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매우 달리 보이는 것처럼, 작가는 '사람'과 '사랑'을 다각도에서 바라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어른으로 살아가는 그녀들, 아직 청년인 토오루와 코우지.
모두 불완전하지만, 그래서 아름다운...
그들의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진다.